[최치원의 聖地 경북 그의 발자취를 찾아서 .2] 경주 독서당과 서악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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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관영기자
  • 2018-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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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산 독서당은 孤雲선생의 옛집…서악서원은 그를 처음으로 배향한 곳

경주시 서악동에 자리한 서악서원은 가장 먼저 최치원을 배향한 서원이다. 매년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선현의 뜻을 받드는 향사를 지낸다.
경주시 배반동에는 최치원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독서당이 자리해 있다. 삼국유사에 최치원의 집터와 관련한 기록이 전해내려 온다.
설총, 김유신, 최치원의 위패가 봉안된 서악서원의 묘우.
조선 철종 1년인 1850년 건립한 ‘문창후최선생독서당유허비’가 독서당 경내에 서 있다. 비문은 경주부윤 이원조가 썼다.

경주 낭산(狼山)은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시대부터 신라인들이 숭앙했던 신령스러운 산이다. 413년 8월, 낭산에는 누각과 같은 구름이 일었는데 사방으로 아름다운 향기가 퍼져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왕은 ‘하늘의 신이 내려와 노니는 것이 틀림없다’고 여겼고 이후 나무 한 그루도 베지 못하게 하였다. 사실 낭산은 해발 100m가 조금 넘을 뿐인 나지막한 야산이다. 그것은 왕경의 동쪽에 누에처럼 부드러운 등줄기로 엎드려 있다. 그러나 시선은 너른 들 너머 멀리 초승달 모양의 월성까지 날아간다. 그곳에 고운(孤雲)의 옛집이라 전하는 독서당(讀書堂)이 있다.


#1. 서적 베개 삼아 풍월 읊던 안식처

날쌔게 달리는 산업로에서 낭산으로 오르는 곧은 길이 들을 가로지른다. 1980년대에는 없었다는 길, 그래서 키 작은 독서당 표석은 몇 m 떨어진 들길 초입에 서있다. 산 아래에서부터는 완만한 계단이다. 길가에는 대숲과 솔숲이 푸르다.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힘썼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벼슬을 내려놓고 은거를 선택했다. ‘그리하여 여기저기 방랑생활을 하며 산림이나 강가에 대와 정자를 지어 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서적을 베개 삼아 풍월을 읊으며 지냈다.’ 그때 그가 주로 거주한 곳이 바로 이곳 낭산의 독서당이라고 전해온다.

삼국유사에는 최치원에 대한 언급이 여러 곳 있다. 그중 신라시조 혁거세왕 조를 살펴보면 ‘최치원은 즉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니 지금도 황룡사 남쪽과 미탄사 남쪽에 옛날 집터가 있어 이것이 최후(崔候)의 옛집이라고 하니 아마도 명백한 것 같다’는 기록이 있다.

오랫동안 미탄사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2014년 황룡사 앞쪽의 절터에서 ‘미탄(味呑)’이라 새겨진 기와편이 여럿 발견되면서 드디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황룡사, 미탄사, 독서당의 연결고리가 풀리게 되었다. 그것은 미탄사의 위치를 증명하는 최초의 자료였고 독서당이 최치원의 옛집임을 방증하는 중요한 증거였다.

계단을 오르면 숲으로 둘러싸인 안온한 터에 독서당이 자리한다. 기와를 얹은 흙돌담이 방형으로 둘러서 있고, 정면으로 작은 사주문이 열려있다. 살짝 기울어진 땅에는 석축 수로가 흐른다. 독서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에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낮은 시멘트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툇마루 앞쪽으로는 원형기둥을 세웠다. 초석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재를 비롯해 조선시대의 석조물까지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어 오랜 시간에 걸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왼쪽에는 3칸 집이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다. 부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살림집으로 여겨진다. 담장 안 앞뜰에는 고운이 사용했다는 우물(古井)이 있다. 둥근 돌로 가장자리를 동그랗게 두른 작은 샘물이다. 지금도 물이 찰랑이며 맑다. 담장 밖에는 그가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 한 그루가 비스듬히 누운 듯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나무는 1982년(1986년이라는 기록도 있다)에 도벌되고 말았다. 독서당은 현판도 없는 무구한 얼굴로 서쪽의 왕경을 바라본다. 은거하여 유랑하였던 그에게 경주의 독서당은 일종의 구심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최치원의 마지막은 알 수 없다. 다만 홀연히 세상을 떠나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오래 떠돌았다.

독서당 경역의 오른쪽에는 따로 담장을 두르고 붉은색 사주문을 단 비각이 있다. 조선 철종 1년인 1850년에 건립한 유허비다. 비석의 전면에는 ‘문창후최선생독서당유허비(文昌侯崔先生讀書堂遺墟碑)’라 새겨져 있다. 비문은 경주부윤 이원조(李源朝)가 썼다. ‘선생은 학문으로는 성묘(聖廟)에 배향할 만하고 문장으로는 사맹(詞盟)의 주인이 되었으며, 뜻은 백이의 세상을 피한 것을 본받았고 자취는 장자방의 신선을 구하겠다고 한 말을 본받았다.’


#2. 퇴계가 직접 현판 쓴 곳에 모셔져

최치원의 모습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의 영정을 모신 곳은 우리나라에 열 곳이 넘는다. 그의 모습은 선비로, 관료로, 신선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문장가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에 최치원에 대한 시가 있다. ‘당나라 과거에 합격한 고운은(孤雲金馬客)/ 동해(신라)의 훌륭한 문장가(東海玉林枝)/ 훌륭한 문장으로 중국을 울리고(射策鳴中國)/ 천하를 진동시켰네(馳聲震四)/ 높은 이름이 당시에 울려 퍼지고(高芬繁)/ 남긴 시문은 지금도 메아리로 울린다(遺韻遠委蛇).’ 이규보는 모든 유학자가 유학의 시조로 섬기는 이가 최치원이라고 했다. 당대에는 이루지 못했던 고운의 사상은 고려시대 이후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류의 정치사상으로 기능하게 되면서 그를 기리기 위한 사우(祠宇)나 서원이 곳곳에 세워졌다.

최치원을 가장 먼저 배향한 곳이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이다. 조선 명종 16년인 1561년, 부윤 이정(李楨)이 김유신(金庾信)의 사당을 세우고자 했을 때, 부의 유생들이 설총(薛聰)과 최치원도 함께 모시기를 청하였다 한다. 이를 받아들여 세 현인의 위패를 한곳에 봉안하였고, 퇴계 이황이 서악정사(西岳精舍)라 이름 지었다. 강당은 시습당(時習堂), 동재는 진수재(進修齋), 서재는 성경재(誠敬齋), 동쪽 하재(下齋)는 절차재(切磋齋), 서쪽 하재(下齋)는 조설재(雪齋), 누각은 영귀루(詠歸樓), 문은 도동문(道東門)이라 하였는데 정사 내의 모든 현판은 퇴계의 글씨다.

‘서악지(西岳誌)’에는 서악서원에 최치원을 배향한 이유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쪽 나라에서 태어나서 그 문장과 공적이 중국을 휩쓸고 후세에 빛낸 이는 천고에 한 사람뿐이다. 이것이 공자를 제사 지내는 사당에 배향하게 된 원인이었다. 저 청송황엽(靑松黃葉)의 글귀를 예언하여 고려의 창업을 비밀리에 찬양하였다는 말은 천루(淺陋)한 사전(史傳)에 불과한 것이다. 기미를 보고 벼슬에서 물러나 깨끗이 은거하여 마침내 자취를 감추어 여대(麗代)의 세상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특립독행(特立獨行)한 그 의(義)는 또한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이를 만하다.’

서악서원은 임진왜란 때 불탔다. 위패는 산골짜기로 피난시켜 다행히 보존할 수 있었다. 선조 33년인 1600년에 터를 다시 고르고 초가를 지어 위패를 봉안했고 2년 뒤 사당을 지었다. 그리고 광해군 2년에 강당과 재실, 전사청(典祀廳), 장서실(藏書室)을 지어 서원의 모습을 갖추었다. 인조 원년에는 유생들의 청으로 사액(賜額)되어 서악서원 현판이 내려졌다. 편액은 당대의 명필 원진해(元振海)의 글씨다. 그 후 1646년에 누각인 영귀루를 지었다. 서악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서악서원은 신라 왕경의 서쪽, 무열왕릉을 비롯한 수많은 옛 무덤이 있는 선도산(仙桃山) 아래 서악마을 초입에 위치한다. 서원 바로 옆 폐교된 경주초등학교 앞에 하마비가 있다. 현재 서악서원의 현판은 퇴계가 지었던 옛 이름 그대로다. 학교가 폐교되기 전, 어린 학생들은 한여름 무더위를 피해 영귀루에 올라 수업을 받곤 했다고 한다. 최치원이 홀로 유학을 떠났던 나이 12세.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이다. 먼 길 돌아 묘우에 모셔진 그는 한 시절 아이들 글 읽는 소리로 흐뭇하였겠다. 지금 서악서원에서는 고택체험과 음악회가 열리고 해마다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선현의 뜻을 받드는 향사를 지낸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이구의, 최치원 문학의 창작 현장과 유적에 대한 연구, 2008, 동경잡기, 경주최씨 중앙종친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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