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그들만의 리그

  • 원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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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05   |  발행일 2018-11-05 제31면   |  수정 2018-11-05
[월요칼럼] 그들만의 리그
원도혁 논설위원

몇년전 이맘때 주말 오후, 대구 달서구청 앞에 있는 학산 골짜기를 걷다가 목도한 일이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는데 등산길 바로 아래 소나무에서 감지된 긴박한 움직임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이게 뭐지? 커다란 까마귀 한마리가 소나무 가지 사이에서 청설모를 잡아 먹으려고 공격하고 있었다. 작은 청설모는 죽을 힘을 다한 나무타기로 도망하고 있었으나 잡힐듯 말듯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잇따라 맞고 있었다. 몇번이나 까마귀 부리에 몸이 닿으려고 하면 ‘꼬로록, 꼬로록’하는 단말마(斷末魔)의 비명을 질렀다. 코앞에서 벌어지는 생생한 추격전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순간 저 포식자 까마귀를 응징해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큰 돌멩이 하나면 족할 터. 시골 생활과 테니스로 단련된 내 오른팔의 돌팔매질 능력이면 2~3m 거리의 까마귀 정도는 정확하게 박살낼 수 있으리라. 오른손에 주먹만 한 돌을 움켜쥐고 던지려고 하다가 ‘아차~!’ 하면서 곧바로 놓아 버렸다. ‘저들의 리그에 인간인 내가 관여해선 안된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청설모는 잡힐 듯 긴박한 순간 나무 줄기 뒤로 피하는 절묘한 기술로 몇번의 위기를 넘기고 다른 나무를 타고 추격권에서 멀어져 갔다. 나뭇가지 때문에 제대로 공격을 못해 먹이를 놓친 까마귀도 그제서야 추격을 포기하고 하늘로 날아갔다. 나는 돌팔매로 까마귀를 죽이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까마귀도 청설모를 잡아 먹지 못했다. 내가 섣부른 의협심으로 그 까마귀를 돌로 내리쳐 죽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생멸(生滅) 리그에 어떤 도움이 되거나 생태계에 발전적 변화를 가져왔을까? 그럴 리 없을 것이다.

양봉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지인에게서 들은 얘기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아카시아 숲속 벌통 앞에서 그는 커다란 두꺼비가 꿀벌을 잡아먹는 광경을 본다. 벌들이 분주히 벌통 출입구로 오가며 꿀·꽃가루를 나르고 있는데 이 두꺼비는 벌들을 혀 끝에 찍어 낼름낼름 입속으로 집어넣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벌통 주인은 두꺼비놈을 응징할 생각은 않고 유심히 관찰했다. ‘저 놈이 왜 벌을 잡아먹지? 도대체 몇마리나 먹는지 어디 한번 보자’는 궁금증이 응징을 잊게 한 원인이다. 그는 두꺼비가 꿀벌을 68마리나 잡아먹고 불룩해진 배를 끌면서 벌통을 벗어날 때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고 했다. 그 해답은 ‘아하! 저 두꺼비도 톡 쏘는 맛을 즐기는 구나’였다나. 자신의 소중한 재산을 축낸 포식자를 징벌하지 않은 그 역시, 그들만의 리그를 존중해준 것이다. 인간이 아무리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미물들의 마이너리그에 아무렇게나 간섭해선 곤란하다. 자연상태를 마구 뒤틀면 그 피해는 인간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올 것이다. 그 지인은 농업고교를 졸업했고, 필자는 오지 산골에서 자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래전 경남 의령의 한 시골논에서 논두렁 보수 작업을 하던 두명의 농부가 큰 멧돼지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텔리비전에 방영돼 화제가 됐다. 이 멧돼지는 인근 산에서 사람이 쳐 놓은 올무에 걸려 상처를 입고는 화가 난 상태였다. 저돌적으로 달려와 10여분간 떠받고 물며 공격하던 멧돼지에 두 농부는 삽과 괭이로 방어를 했지만 불같이 화가 난 멧돼지에 수세를 면치 못했다. 멧돼지는 화풀이만 하고는 도로 산으로 돌아갔다. 이 장면을 논위 길가에서 비디오 카메라로 촬영한 사람이 방송국에 제보해 방영된 사안이다. 멧돼지는 고구마나 채소 등 농작물을 해치고 피해를 입히는 유해동물이다. 농작물 피해가 심각하거나 너무 많아서 통제불능일 때 지자체는 엽사를 동원해 개체수 조절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산속에서 도토리나 밤을 주워 먹고 사는 멧돼지는 자극하지 않으면 사람에게 달려들지 않는다. 그들만의 생존 방식과 영역을 인정해주면 인간과 동물도 서로 공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지구의 최상위 고등생물인 인간들이 찬란한 문명을 이룬 것은 맞다. 하지만 이 지구는 오로지 인간들만의 것은 아니다. 다양한 생명체들이 함께 어우러져 공생할 때 아름다운 행성으로 인정받을 것이다. 메이저리그가 주목받지만 마이너리그도 존중돼야 마땅하다.
원도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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