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칼럼] 직원 행복, 고객 행복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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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1-02   |  발행일 2018-11-02 제23면   |  수정 2018-11-02
[조정래 칼럼] 직원 행복, 고객 행복

얼마 전 저녁 술잔을 돌리던 와중, 전후 맥락이 아리송한 얼떨결에 하나의 배지를 셔츠 왼쪽 주머니에 달게 됐다. 500원짜리 동전보다 약간 크고 동그란, 노란 바탕에 활짝 웃는 얼굴의 스마일 배지. 아무런 글자도 장식도 없는 단순한 만면의 미소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슬며시 웃음짓게 하는 그런 전염력을 은은하게 발산한다. 이 배지는 기관의 무슨 무슨 공익 캠페인용도 아니고 흔하디 흔한 상징물도 아닌 사무소의 직원용이라는 게 더 관심을 끈다. 제작자도 한국전력 포항북지사 박영구 지사장으로 개인이다. 명랑한 근무 분위기와 행복한 직장 만들기를 위해 배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함께 꿈꾸는 행복 일터 도약하는 북포항지사!’ 사무실 벽면과 출입구 등에는 행복 전파 현수막과 스마일 액자가 걸려 있다. 알고 보니 박 지사장의 스마일 확산운동의 이력이 간단치 않았다. 10여 년 전 웃음치료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지금까지 근무해 온 사무실에 웃음전도사 역할을 자처했고, 경찰 관서 등 외부로 웃음을 전파·확산하며 병원과 시설 등지의 이웃들을 대상으로 웃음 치료 봉사활동을 해 왔다. 웃음 치료 강좌 교육용 CD 제작과 무료 배포도 계속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역시나 그랬다. 좌중을 즐겁게 하고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그의 말과 자세가 바로 ‘행복한 일터 가꾸기’ 역사에서 나왔음을 알겠다. 그의 내부용 건배사 ‘자전거, 따르릉(자랑스러운, 전력인으로, 거듭나자)’ 역시 자족감의 한 표현일 터다.

직원 행복이 고객 만족의 원동력이라는 명제는 우리 사회의 전도된 조직 원리를 거짓으로 규정한다. 고(故) 배우 김영애가 열연한 영화 ‘카트’는 ‘고객은 왕’이라는 슬로건 아래 마트의 비정규직 직원들이 진상 고객 앞에 꿇어앉아 잘못을 비는, 뒤집어진 인권의 현주소를 고발했다. ‘카트’ 제작보고회에서 그는 ‘사회적 의무감을 가지고 촬영에 임했다’고 했고, 2014년 제35회 청룡영화제에서 영화 ‘변호인’으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카트’의 흥행 부진에 대한 아쉬움과 서운함을 전하기도 했다. 일상에서 만나는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웃음이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고객은 왕’이 맞는가. 교수이자 저널리스트인 강인규는 ‘망가뜨린 것 모른 척 한 것 바꿔야 할 것’이란 저서 ‘손님이여, 당신은 왕이 아니다’란 글을 통해 “한국 기업들이 지겨울 정도로 ‘고객 서비스’를 강조하는 것은 고객을 끔찍이 아껴서라기보다는 경영진의 무능을 덮기 위해서다”라고 일침했다. 이어 “투자와 혁신을 통해 상품을 제대로 만들어 놓으면 판매원들이 얼굴에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웃지 않아도 잘만 사간다.… 애플도 잘 보여주고 있듯 최근 부상하는 마케팅은 오히려 ‘고객이 안달할 때까지다”라고 친절을 강요하는 문화를 정면으로 통박했다.

대기업 오너와 그 2·3세들의 갑질에 이은 진상 손님들의 ‘왕질’이 사회문제로 떠오른 지 오래다. 서비스업 종사자들을 비롯한 감정노동자들은 ‘손님은 왕’이란 이데올로기에 의해 고객의 노예로 전락한다. 오너는 직원을 패고 고객은 직원을 꿇어앉히는 야만의 한국사회에서 직원은 불행하다. 기실 다수의 소비자는 매장 직원들의 과도한 친절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강 교수는 ‘감정노동으로 전락한 고객만족’과 ‘고용불안에 기생하는 진상손님’이 만연하고 횡행하는 현실을 개탄하며 ‘직원은 회사 문을 나서는 순간 또 다른 고객’이자 ‘직원은 가장 먼저 만족시켜야 할 고객’이라고 설파했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배려가 이처럼 망가진 공동체와 한국사회를 복원할 수 있다는 결론도 제시했다.

고객이 직원되고, 직원이 고객되는 원리가 요체다. 문제는 역지사지. 직원이 왕이고 직원이 행복해야 고객 행복도 챙겨줄 수 있다는 거다. 다시 한전 북포항지사의 행복한 일터 만들기와 스마일 운동이 서비스업계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다면, 그래서 이 땅의 수많은 감정노동자들이 경련에 가까운 미소가 아니라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다면, 직원과 고객이 모두 왕이 되는 그런 사회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신세계 아닐까. 최근에는 국토청결운동을 시작하면서 세상을 환하고 깨끗하게 바꿔 가려는 직원 행복전도사 박 지사장의 꿈은 틀림없이 이뤄질 터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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