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聖地 경북 그의 발자취를 찾아서 .1] 경주 초월산대숭복사비와 상서장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밴드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구글플러스
  • 기사내보내기
  • 박관영기자
  • 2018-11-01
  • 기자가 쓴 기사 더보기


왕의 命으로 지은 4개의 비명 중 가장 먼저 지은 ‘대숭복사비’

최치원이 머물며 학문을 연구했던 상서장. 경주시 인왕동에 자리해 있고, 이곳에서 최치원은 임금에게 올린 ‘시무십여조’를 썼다고 전해진다.
상서장 동쪽 벼랑에는 기이한 바윗돌들이 대(臺)를 이루고 있다. 둥치 큰 나무들이 자유롭게 몸을 뒤틀어 호위하는 이곳을 최치원의 호를 따 ‘고운대(孤雲臺)’라 부른다.

상서장 경내에 있는 ‘문창후최선생상서장비’.

경주에 자리한 초월산대숭복사비는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 중 하나다. 비문이 언제 완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비석은 진성여왕 10년인 896년에 완성됐다. 지금 숭복사지에 온전한 모습으로 서있는 초월산대숭복사비는 복원한 것이다.

◆시리즈를 시작하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유교·불교·도교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식을 겸비했던 ‘천재’였다.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려 신라를 다시 일으키려 했던 ‘개혁가’이기도 하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중국 당나라까지 이름을 떨친 ‘최고의 문장가’였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한·중 관계 역사를 상징하는 인물로 극찬한 ‘한류 원조’로도 불린다. 높은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 펼쳐지 못했지만 최치원이 이룩한 학문과 사상 그리고 개혁의지는 지금도 큰 족적으로 남아 있다. 그런 최치원의 뿌리가 경북이다. 경북을 최치원의 성지(聖地)이면서 종주도시로 부르는 이유다. 무엇보다 그의 발자취가 경북 곳곳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총 4회에 걸쳐 ‘최치원의 聖地(성지)…그의 발자취를 찾아서’ 시리즈를 연재한다. 시리즈는 경북을 무대로 펼쳐진 최치원의 이야기와 그가 남긴 발자취를 집중 조명한다. 1편에서는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 중 하나인 경주 ‘초월산대숭복사비(初月山大崇福寺碑)’와 시무십여조를 쓴 역사의 현장 ‘상서장(上書莊)’을 찾아 나선다.



‘돛 달아 푸른 바다에 배 띄우니 / 긴 바람은 만리에 통하네 / 뗏목 탄 한나라 사신 생각나고 / 약 캐는 진나라 아이 기억나네 / 해와 달은 허공 밖에 / 하늘과 땅은 태극 안에 있네 / 봉래산 가까이 보이니 / 나도 이제 신선을 찾으려 하네.’ 최치원(崔致遠)의 시 ‘범해(泛海)’다. 그는 17년간의 이국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은거하기 전에 쓴 시라는 견해도 있다). 이립(而立)을 앞둔 담담한 얼굴이었다.

초월산대숭복사비
왕으로부터 ‘사산비명’ 짓도록 명 받아
4개 중 처음 제작…비석 10년만에 완성
최초의 절 비명 …왜란때 훼손돼 복구
두머리거북받침은 경주박물관에 전시

상서장
진골귀족 부패로 무너지던 신라 위해
정치 개혁안 ‘시무십여조’ 작성한 곳
진성여왕에 올리고 고운대서 기다려
효공왕 즉위 후엔 새 국가 암시 ‘상서’

#1. 초월산대숭복사비

경주 원성왕릉(괘릉)에서 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길은 집과 들을 지나 토함산 서쪽의 나지막한 산중턱에 닿는다. 마을은 말방리(末方里), 신라시대 행정구역 제도인 조방제(條坊制)의 ‘마지막 방’이라고도 하고, 마방(馬房)이 있었다고 해서 ‘말방’이라고도 한다. 길 끝은 풀들로 뒤덮인 너른 터다. 거기에 한 그루 감나무와 온전치 못한 두 기의 탑이 서 있다. 그리고 그 뒤쪽에 용의 머리를 가진 두 마리 거북의 등에 우뚝 올라 선 비석 하나가 있다. 최치원이 쓴 ‘초월산대숭복사비’다.

최치원은 신라 말 문성왕(文聖王) 때인 857년에 태어났다. ‘4세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해 10세 때 사서삼경을 읽었다’라는 기록이 전할 만큼 총명한 아이였다. 그는 12세가 되던 868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합격했다. ‘토황소격문’ 등으로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친 그는 885년 3월 17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헌강왕 11년(885년)이었다. 고국에 돌아온 최치원은 각종 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인 ‘시독 겸 한림학사’에 임명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886년 봄 최치원은 왕으로부터 비명(碑銘)을 지으라는 명을 받는다. 바로 ‘대숭복사비’를 위한 글이다.

비석은 ‘이 산을 초월산, 이 터를 대숭복사’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비문은 대숭복사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원성왕릉이 자리한 땅에는 원래 ‘곡사(鵠寺)’라는 절이 있었다. 798년 능원을 조성하면서 곡사를 남쪽으로 옮겨 대숭복사(大崇福寺)라 개칭했고 왕릉을 지키는 원찰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왕릉을 이루는데 비록 왕토(王土)라고는 하나 실은 공전(公田)이 아니어서 부근의 땅을 묶어 좋은 값으로 구했다’고 한다. 능을 조성하기 위해 땅을 국가에서 사들였다는 것이다. 이는 일제시대 식민사관 비판의 가장 중요한 근거 가운데 하나인 토지국유제설을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이 언제 완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비석은 진성여왕 10년인 896년이 되어서야 완성됐다. 헌강왕이 886년, 이어 왕위에 오른 정강왕이 887년에 사망하는 등 왕실 내부의 혼란으로 건립이 늦춰진 것으로 여겨진다. 최치원이 지은 4개의 비문을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 한다. ‘대숭복사비’는 그중 하나로 가장 먼저 명을 받아 지은 것이고 또한 우리나라에서 절의 비명으로는 처음이다. 비는 임진왜란 때 절과 함께 파괴되었다고 전해지며 4개의 비명 중 유일하게 전하지 않는다. 남아 있는 것은 용의 머리를 가진 쌍거북 받침과 비편 몇 조각 뿐, 그것은 일제강점기부터 이곳 절터에서 수습됐다.

서쪽으로 광대한 시야를 펼친 숭복사지에 지금 온전한 모습으로 서있는 초월산대숭복사비는 복원한 것이다. 필사본으로 전해 오던 비문을 모아 맞추었고,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쌍계사진감선사탑비’의 글씨를 집자해 새겼다. 비석을 얹었던 두머리거북받침(雙頭龜趺)은 1930년대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현재 야외전시장에 있으며 비석 조각들은 경주박물관과 동국대박물관에 소장 전시돼 있다.

#2. 상서장

귀국 초기 최치원은 의욕적으로 경륜을 펴려 했다. 그러나 진골 귀족들의 벽은 견고했고 887년 진성여왕이 등극했을 때 신라는 이미 급속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지방에서는 호족세력이 등장해 중앙 정부를 위협했으며 국가의 재정은 궁핍했다. 889년에는 농민의 봉기로 전국적인 내란이 일어났다. 한계를 느낀 최치원은 대산군(전북 태안), 천령군(경남 함양), 부성군(충남 서산) 등의 태수로 외직을 떠돌았다. 그러나 개혁의 의지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894년 최치원은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 세력의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한 개혁안을 진성여왕에게 올린다. ‘시무십여조’다.

상서장. 최치원은 이곳에서 왕에게 올린 글을 썼다. 금 거북이 서라벌 깊숙히 들어와 편하게 앉아 있다는 금오산(金鰲山) 북쪽 기슭에 신라의 궁성이었던 월성이 훤하게 내다보이는 곳이다. 계단을 가파르게 오른다. 끝은 외삼문이다. 삼문을 지나면 화강암 판석을 깐 중앙 길이 추모문(追慕門)에 닿고 그 안쪽에 정면 5칸의 상서장이 교교하게 앉아 있다. 상서장 뒤편 단을 높인 양지에는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影幀閣)이 자리한다. 그가 쓴 개혁안의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당시 진성여왕은 개혁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최치원은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오른다. 그러나 개혁안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897년 진성여왕이 즉위한지 11년 만에 정치문란의 책임을 지고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당시 신라는 끊임없이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최치원은 새로운 국가의 등장을 예감한 듯하다. 그는 상서했다. ‘계림황엽곡령청송(鷄林黃葉鵠嶺靑松)’, 즉 ‘신라의 계림은 낙엽이 지고, 고려의 송악산엔 솔이 푸르다’는 뜻이다. 왕은 크게 노했고, 최치원은 이후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불혹(不惑)이었다.

고려가 건국되고 제8대 현종의 시대에 들어 최치원은 문창후(文昌侯)에 추봉하고 공자묘에 배향됐다. 문창후는 공덕을 기리고 칭송하는 이름이다. 현종이 그의 상서를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최치원이 머물며 공부하던 곳을 상서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상서장 경내에는 ‘문창후최선생상서장비(文昌候崔先生上書莊碑)’가 있다. 고려 말기에 세웠다는데, 현재의 비는 고종 연간에 경주부윤 이돈상이 비문을 지어 통일신라시대의 연화대석 위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상서장 동쪽은 벼랑이다. 기이한 바윗돌들이 대(臺)를 이루고 둥치 큰 나무들이 자유롭게 몸을 뒤틀어 호위하는 그곳을 후세 사람들은 ‘고운대(孤雲臺)’라 이름 붙였다. 아래에는 남천(南川, 문천(蚊川)이라고도 한다)이 월성으로 향한다. 최치원은 임금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린 뒤 이곳에 올라 기다렸다고 한다. 계단 오른편에는 최치원의 시 ‘범해’가 커다란 바윗돌에 새겨져 있다. 돛 달아 푸른 바다를 건너왔던 그는 다시 신선을 찾아 떠났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이구의, 최치원 문학의 창작 현장과 유적에 대한 연구, 2008. 이구의, 최치원의 ‘대숭복사비명고’, 2004. 김승황, 고운 최치원의 시텍스트 ‘범해’와 ‘유선가’ 해석, 2016. 이우성, 신라시대 왕토사상과 공전, 1965. 김복순, 경주 괘릉의 문헌적 고찰, 201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Copyrights ⓒ 영남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