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안중식 ‘백악춘효도(白岳春曉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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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26   |  발행일 2018-10-26 제39면   |  수정 2018-10-26
근대 회화교육 일으킨 ‘미스터 션샤인’…일제가 해체하기 전 ‘경복궁’모습 아픔 서려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안중식 ‘백악춘효도(白岳春曉圖)’
[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안중식 ‘백악춘효도(白岳春曉圖)’
안중식, ‘백악춘효도’, 비단에 담채, 125.9 x 51.5㎝, 1915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총’ ‘영광’ ‘새드엔딩’.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키워드다. 조선시대 말기가 저물고 근대로 가는 길에서 우리의 주권을 빼앗으려는 일본에 맞서 불꽃처럼 산 주인공을 비롯한 의병들의 이야기다. 드라마는 종영되었지만 ‘우리 근대’의 암울했던 히스토리를 한 연인의 러브스토리로 극화하여 깊은 울림을 주었다.

조선시대 말기, 일제 침략의 혼란 속에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민초와 애국지사 등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예술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근대 민족화단 형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화가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도 그 들불 중의 한 명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기울어가는 조선왕실의 경복궁을 묘사한 ‘백악춘효도(白岳春曉圖)’가 있다. 일본이 경복궁 건물을 해체하기 전의 모습을 담은 귀중한 작품이다.

주권이 일본으로 넘어가자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합쳤다. 나라를 위해 애국단체가 움직이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이들은 조선의 뿌리를 지키기 위해 힘을 모았다. 서화계에는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의 화풍을 계승한 안중식과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 1853~1920)이 근대화단을 지켰다. 그들은 우리의 전통서화에 서구의 미술을 절충하여 ‘근대 미술’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개척하였다.

안중식은 서울에서 성균관 생원을 지낸 안홍구(安鴻逑, 1810~1873)의 5남5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그는 집에서 서화를 익혔고, 1년간 도화서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고 한다. 여러 대에 걸쳐 크고 작은 벼슬을 한 가문답게 그는 한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학식이 높았다.

1881년 정부에서 중국의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청나라로 떠날 사신단 영선사(領選使)를 결성한다. 그해 9월 안중식은 조석진과 함께 제도사(製圖士)로 선발되어 중국 허베이(河北)성 톈진(天津)에서 1년 동안 신무기의 제조법과 조련법을 배우고 돌아온다. 당시 영선사를 이끈 김윤식(1835~1922)은 “안중식은 매우 총명하여 그곳에서 쓰이는 말을 이미 통달하였고, 조석진과 함께 화도(畵圖)를 배우는데 있어서, 그 예(藝)가 최고에 이르렀다. 본래 쉬운 것이 아님에도 그 기구(器具) 운용의 길에 이미 들어섰다”고 전했다.

안중식은 연수에서 사물을 과학적으로 보는 관찰력을 익히고, 과학문명의 중요성을 체감한다. 1902년에는 조석진과 함께 주관화사(主管畵師)로서 고종과 순종의 초상 제작에 참여한다. 이 공로로 통진(通津), 양천(陽川) 군수를 지내기도 했지만 1907년경에는 군수직을 사임하고 창작활동에만 전념하여 화가의 길을 걷는다.

안중식은 서화계의 명성이 높았던 장승업의 화방을 방문하여 그의 화풍을 전해 받았다. 그는 중국 청대 문인화풍의 심산유곡형(深山幽谷形) 산수화와 인물화, 기명절지, 화조화, 영모화 등 여러 분야의 회화를 계승하여 조선 말기와 근대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 다채로운 화제(畵題)와 직업적인 필치의 화격(畵格)을 발휘하여, 만년인 1910년대에는 뚜렷한 근대적 표현의식이 담긴 작품을 남겼다.

1911년 안중식은 이왕직의 후원을 얻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 교육 기관인 ‘서화미술원’에서 한국 근대 전통회화학교의 체계를 갖추는데 앞장선다. 안중식과 조석진은 서화미술원에서 화가를 양성하여 동양화 1세대인 청전 이상범(1897~1972)과 소정 변관식(1899~1978), 심산 노수현(1899~1978), 이당 김은호(1892~1979) 등을 배출한다.

‘백악춘효도’는 암울한 조선 왕실의 상징인 경복궁을 지키려는 정신이 강하게 배어 있다. 제목의 ‘춘효(春曉)’는 ‘봄날 새벽’의 의미로,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근대의 새 시대를 여는 염원을 담았다. 이 작품은 흥미롭게도 쌍둥이다. 1915년 을묘년에 그린 여름본과 가을본 두 점이 있다. 가을 작품은 여름 작품 보다 쓸쓸하고 황량하다. 현실적인 감각이 밴 시대의 아픔이 서려 있기에 더 그런지도 모른다. ‘백악춘효도’는 굳건한 조선의 상징 북악산을 당당하게 수묵담채로 묘사하고 있다. 산과 건물 사이에 자욱한 안개를 처리하여 신비감을 더한다. 반듯한 기와지붕은 왕실의 든든함을 기리는 것 같다. 여러 종류의 나무에서 왕실의 풍족하고 넉넉한 기운이 감돈다. 경복궁을 지키는 광화문은 우리의 자존심인 양 우람하다. 앞에서는 해태상이 조선을 수호하고 있다. 왼쪽 상단에는 ‘백악춘효’라는 제목이 있고, 을미년 가을에 안중식이 그렸다는 글에 낙관이 있다.

안중식은 교육자로서 화가를 양성하기도 했지만 민중계몽단체인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3·1운동을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과 가까운 사이였다. 1919년 3·1운동에 연루되어 심하게 조사를 받은 후 병으로 생을 마감한다. 1년 후에는 조석진마저 세상을 떠난다. ‘새드엔딩’이다. 안중식에게 ‘총’은 작품이었다. ‘슬픈 끝맺음’은 우리 근대의 초상이지만 작품은 남아서 그날의 ‘영광’을 증언한다.

화가 2572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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