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는 것, 기록된 경험을 잘 ‘보존’하는 것, 그리고 기록을 통해 ‘재현’하는 것이 역사다. 우리는 종종 기록과 보존은 무심히 두고 재현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오해를 낳을 수 있다. 박물관에서 ‘역사를 만난다’는 것은 사실을 기초로 해석을 해본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실이 없으면 해석 자체가 없겠지만, 사실을 부정하면 결코 단순하지 않은 역사의 진실 또한 쉽게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언론박물관 ‘뉴지엄’
‘자유’의 중요성 일깨우기 위해 개관
전세계 유명 일간지 80종 1면 갤러리전
지구촌 오늘…한국신문 2종류도 전시
진실보도 희생 언론인 1900명 추모벽
방송 기자역 ‘NBC 뉴스 체험관’인기
구술기록 프로젝트 ‘스토리코어’
인생에도 그냥 지나치는 시간은 없다
보통 사람들 이야기‘움직이는 박물관’
이야기로 모인 데이터가 지혜로 저장
서로가 미처 말하지 못한 감사·고마움
작은 녹음부스 메시지, 美 전역에 감동
◆보이지 않던 시간들을 보여주는 곳, 뉴지엄(Newseum)
1997년 미국 워싱턴DC의 서쪽 버지니아 알링턴에 세워져 5년간 225만명의 관람객을 맞이했던 ‘뉴지엄’이 많은 이들의 아쉬움 속에 2002년 폐관됐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2008년 11월 비영리 언론단체 ‘프리덤 포럼’이 워싱턴DC 한복판에 다시 뉴지엄의 문을 열었다. 뉴 ‘뉴지엄’인 셈이다. 뉴스(News)와 박물관(Museum)의 합성어로 언론박물관의 대명사가 된 이 박물관은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사이에 있으면서 뉴스를 전하는 대중매체의 역사와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있다.
뉴지엄 입구 흰 대리석 벽에는 언론과 종교 등 인간의 다섯 가지 기본적 자유를 보장하는 미국 수정헌법 제1조 전문이 크게 새겨져 있다. 그 의미가 어찌 미국인들에게만 통하는 것이랴. 뉴지엄은 세상을 바로 세우려는 언론인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많은 이들에게 정보와 즐거움을 제공하려는 본래의 목적도 있겠지만, 전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지하 1층 ‘오리엔테이션 극장’에서 ‘뉴스란 무엇인가’라는 영상물 감상으로 시작하는 박물관 투어는 ‘베를린 장벽 갤러리’에서 무너진 베를린 장벽의 실물을 보고 꼭대기 층으로 가게 된다. 6층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테라스’ 앞에는 전 세계 유명 일간지 80종의 1면이 전시된 ‘프런트 페이지 갤러리’가 있다. 뉴지엄은 각 신문사로부터 매일 PDF파일을 전송 받아 이 갤러리와 여러 곳의 키오스크에서 세계 각지의 메인 뉴스를 보여준다. 한참 동안 헤드라인을 보며 참으로 다사다난한 지구촌의 오늘을 느낀다. 한국신문으로는 중앙일보·동아일보가 보인다.
5층은 지난 반세기 동안의 언론사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뉴스의 역사’ 전시실. 4층은 9·11테러 대참사를 알리는 전 세계 127개국 신문의 1면 톱으로 꾸며진 ‘9·11 갤러리’. TV·라디오·인터넷 등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뉴스를 소개하는 전시관은 3층에 있다. 전시관 오른쪽은 취재 현장에서 숨진 언론인들을 기리는 추모의 벽이다. 혁명이 그러하듯 자유 또한 희생 없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이 가슴 저릿하게 다가온다. 거대한 반투명 유리에는 1837년부터 진실보도를 위해 희생된 언론인 1천900명의 이름이 그들의 국적과 함께 새겨져 있다. 현장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진실을 전달하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과 열정에 누구나 숙연해지는 공간이다. 2층에는 뉴지엄 관람의 하이라이트 중의 하나인 ‘NBC 뉴스 체험관’이 있다. 이곳에서는 누구나 실제 방송 기자나 카메라 기자의 역할을 직접 해봄으로써 뉴스 보도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1층에는 실감나는 보도사진 68점이 시대별로 전시돼 있는 ‘퓰리처상 수상 사진전’이 마련돼 있다.
흥미로운 시간의 터널을 3시간 넘게 누볐다. 뉴지엄의 전시실은 다른 박물관과 달리 시끄럽기 그지없다.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며 관람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낯선 옆사람과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단어가 여기만큼 생생하게 다가오는 공간이 또 있을까.
1999년 뉴지엄을 찾았을 때는 자신의 생일날 발행된 ‘시카고 트리뷴’ 1면을 프린팅 액자에 끼워 파는 코너가 참 흥미로웠는데, 이제 스마트폰 시대라 그런 재미는 없어졌다. 어디를 봐도 놀랄 만큼 임팩트 있는 색감을 보여주는 전시기법, 각 나라의 언론자유 정도가 지도에 컬러풀하게 표현돼 있어 눈길을 끈다. 설마! 대한민국의 언론자유 지수는 아직 100%가 아니라고 표시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은 세상에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
‘움직이는 박물관’이라고 해야 할지, 오럴 뮤지엄(Oral Museum)이라고 해야 할지 아직도 망설여지는 것이 있다. ‘보통 사람들의 역사가 모여 있는 곳’이라 하면 좀 더 적당한 표현일 수 있을까.
스토리코어(StoryCorps·이야기 군단)라는 독특한 이름의 구술기록 프로젝트를 창안한 데이브 아이세이(Dave Isay)는 미국인으로 전직 라디오 프로듀서다. ‘어떤 사람이든 저마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이 이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역사’와 ‘이야기’의 어원은 라틴어 ‘히스토리아’로 같이 쓰인다. ‘역사=이야기’라는 의미다. 역사에 그냥 지나간 시기가 없듯이 인생에도 그냥 지나친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스토리코어는 2005년부터는 대포알 같이 생긴 중고 버스를 개조한 이동 부스를 몰고 미국 전역에서 보통사람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2015년 테드상(TED Prize)을 수상한 그는 “보통 사람들의 인터뷰가 역사의 한 기록으로 남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소감을 밝혔다. ‘스토리코어의 미래’를 물으니 “인간의 지혜를 모으는 더 큰 디지털 보관소가 되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야기로 모아진 데이터는 지혜가 된다는 그의 생각이 놀랍다.
그가 녹취한 목소리는 뻔한 무용담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진정한 삶의 모습이다. 스토리 코어가 자신의 도시에 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부모·형제·친구·사제 간의 녹음 신청이 쇄도하고, 그들은 그간 차마 말하지 못했던 ‘미안하고, 고맙고, 자랑스럽고, 사랑하고, 용서한다’는 메시지를 작은 녹음부스 안에서 서로 나눈다. 그 메시지는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 감동으로 이어진다. 이 기록들은 책으로 출판돼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 이 경이로운 프로젝트를 통해 그가 담아낸 이야기는 공영 라디오 NPR를 통해 전국에 방송되고 미국 의회도서관에도 보관된다. 이민사회·다문화사회 등 복잡한 미국 사회를 통합하는 소중한 지혜를 얻었다는 논평도 이어졌고 큰 상도 많이 받았다. 이런 구술기록 프로젝트의 주인공 데이브의 작업은 관 주도도 아니고 방송사 프로그램의 부산물도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값어치가 높다.
TV와 신문의 감동적인 다큐멘터리와 특집기사를 우리는 오래 기억하고 고마워한다. 하지만 더 많은 따뜻한 이야기, 더 깊은 슬픔을 길어 올리는 장치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 모든 것을 언론사에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제 공간적으로는 뉴지엄이, 시간적으로는 스토리코어가 대안이 될 수 있다. 좋은 화질로 담아야 한다는 과욕도 버리고, 언론사만 나서야 한다는 편견도 버리고, 예산이 넉넉해야 할 수 있다는 오만도 버려야 한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큰 울림이었다. 역사의 주인공들이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너무도 쉽게 쓸려 가버린다. ‘세상은 오히려 자신을 잊으라 했다’는 설움을 안고 사라지는 주인공들도 만나야 한다.
어떤 박물관이든 지나간 과거를 모두 증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박물관이 애써 붙들고 있는 진실들은 ‘과거 없이는 미래를 판단할 방법이 없다’는 경고를 보낸다. 세상살이에 아무리 멱살 잡혀도 당당한 것은 도도히 흐르는 시간이었음을, 그것 또한 대단한 역사였음을 뉴지엄과 스토리코어는 말해주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진실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 설사 미뤄지더라도 끝내 다시 만나게 될 믿음이 있다는 것, 그 시작과 끝을 보았다. 역사가 지은 인간 사이의 불화(不和)를 이처럼 잘 녹여낸 곳은 그 어디에도 없을 듯 싶다.
(대구교육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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