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지리산 뱀사골

  • 뉴미디어부
  • |
  • 입력 2018-10-26   |  발행일 2018-10-26 제37면   |  수정 2018-10-26
단풍 숲 사이 수려한 계곡, 상상과 환상이 잠들어 있는 詩의 화수분
20181026
뱀사골의 청정수와 단풍,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비경.
20181026
뱀사골 탁용소의 1급 청정수와 용이 승천하며 남겼다는 자국.
20181026
와운마을 천년송의 신비한 모습.
20181026
단풍과 계류수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뱀사골 계곡.
20181026
지리산 빨치산의 토벌을 기념하기 위한 동상들.
20181026
1950년대 전후 국군과 지리산 빨치산이 사용한 무기 전시장.

뱀사골 가을, 아주 오래전에 여기에 온 적 있었다. 그때는 가을비가 내리고, 단풍은 알레르기처럼 전신에 울긋불긋 돋았었다. 아, 저 숨 막히는 단풍의 두드리기에 나는 기쁨보다 슬픔에 치를 떤 적 있었다. 누구라도 안다. 단풍은 슬픔이고 가을비는 아픔이란 것을. 뱀사골 들머리 데크길에서 나는 그날의 단풍과 가을비가 헛것으로 자꾸 보여, 몇 번이고 눈을 비벼야 했다. 단풍으로 가득 찬 저 아름다운 계곡과 청옥 빛으로 흐르는 1급수인 맑은 물에 어리는 오색의 단풍도 왠지 자꾸 환각으로 여겨졌다. 도무지 생동적인 감각을 느낄 수 없다. 누가 어떻게 이런 장관을 연출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게 꿈이나 환영이지 어떻게 생시란 말인가.

기묘한 기암괴석 굽이 흐르는 계류수
울긋불긋 경관 또다른 세상 닿는 길목
불탄 배암사 절명서 생긴 호칭 뱀사골
바위 밑 작은 공간 석실서 빨치산 활동

눈 아플 정도로 이어지는 비경에 멍멍
용이 머리 흔들며 오르는 형상 요룡대
뱀이 허물벗고 목욕후 용이 된 탁용소
거울보다 더 맑은‘소’에 비친 내모습
한 잎의 단풍이 된 ‘나’를 씻어주는듯

청명한하늘 이고있는 와운마을 천년송
천년의 침묵과 붉은 용비늘의 나무껍질


기기묘묘한 기암괴석과 하얀 포말을 뿌리며 굽이굽이 흐르는 계류수는 단풍나무 숲 사이로 기어가는, 영락없는 대형 꽃뱀이다. 이렇게 수려한 경치는 또 다른 세상에 이르는 길목이다. 우리는 이러한 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내면에 시로 나타나는 우주탄생의 말씀에 귀 기울이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차오르는 감정에 이입되면, 그것이 바로 시(詩)고, 시는 언어의 반전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것이다. 저 뱀사골 계곡은 상상과 환상이 잠들어 있는 시의 화수분이다.

그럭저럭 석실에 도착한다. 이 부근 어딘가에 있었다는 배암사란 절. 정유재란에 불타고, 배암사 절명에서 뱀사골이란 호칭이 생겼다는데, 불타는 배암사의 불꽃이 모두 단풍이 되어 전해오는지, 이곳 단풍은 유독 더 붉게 타고 아름답다. 그러나 이것은 뱀사골 여러 유래 중 하나에 불과하다. 아주 큰 바위가 겹치면서 바위 밑에 작은 공간을 만들어 석실이라 부른다. 1950년대 지리산에 많은 빨치산들이 숨어들었고, 이들은 소식전달과 사상교육을 위한 신문과 기관지를 이곳에서 출판 인쇄하였다.

이데올로기는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자연 발생하는 것이고, 시대와 문화 나라에 따라 얼마든지 바뀌는 것인데, 그 하나의 허상으로 지나가는 이데올로기(공산주의) 사상을 교조주의로 둔갑시켜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같은 종을 대량 학살하는 유일한 동물, 학명으로 크로마뇽인, 인간의 이러한 어리석은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영장류이고 신의 아들이라고 스스로를 자칭하는 현생인류(Homo Sapiens). 그들은 과연 영장류이고 신의 아들일까 하는 생각이 불현 듯 지나갔다.

다시 걸어 나간다. 눈이 아플 정도로 이어지는 비경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정신이 멍멍해진다. 데크길에는 단풍객들로 부딪칠 지경이다. 각 지방에서 온 단풍객들로 갖가지 사투리가 튀어나온다. 그러나 내용은 비슷하다. 단풍도 단풍이지만 살아가는 이야기, 말하자면 돈과 음식, 사랑, 증오에 관한 대화다. 우주의 시간을 하루로 가정하면 한 사람의 일생은 1초에 불과하다. 단 1초. 우리 일생은 번개처럼 지나간다. 누구라도 한 생에 대한 회고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우리의 스토리텔링은 항상 임계점에 있다.

와운골과 뱀사골의 물이 만나는 곳에 있는 요룡대를 본다. 큰 바위가 마치 용이 머리를 흔들며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여 요룡대라 부른다. 다리를 건너 우측의 옛길로 들어간다. 탁용소가 나타난다. 큰 뱀이 허물을 벗고 목욕한 후 용이 되어 탁용소라 명명했다는 소(沼)는, 백옥 같은 물이 너무 맑아 저절로 찬탄이 나온다. 그 찬란한 진홍의 단풍 숲이 물에 비치고, 맑은 물과 계곡의 아름다움이 그리는 화폭은 감동 그 자체다. 저 거울보다 훨씬 더 맑은 물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본다. 물속에는 단풍들이 천개의 손, 천개의 눈이 되어, 한 잎의 단풍이 되어 있는 나를 씻어준다. 차라리 저 물에 잠긴 나의 얼개가 물에 섞여 스르륵 사라진다면, 그럼 용이, 아니면 다른 무엇이 되는 것일까.

마침 그때, 우리나라 고유종이며 1급수를 대표하는 물고기인 참갈겨니떼가 몰려든다. 눈이 크고 세로로 은빛 금빛 암갈색의 줄무늬가 있는, 그 물고기는 너무 맑고 투명하여, 청옥의 물에 비치는 작은 오로라처럼 보였다. 나는 이토록 맑고 맑아 마치 영롱한 고승의 사리처럼 불가사의한 빛을 발하는 물고기를 본 적이 없다. 절에서 왜 불전사물에 목어를 두는지, 이제서야 그 존재이유를 알았다. 참갈겨니 떼가 나의 물속 그림자를 지나가면서 나도 내속에, 영롱한 빛의 작은 오로라가 느껴진다.

그러나 마냥 이렇게 머뭇거릴 수가 없다. 다시 걷는다. 깊은 수심과 양면이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소(沼)를 만난다. 이 소는, 뱀 모양이기도 하지만, 뱀사골 전설에 나오는 이무기가 이곳에서 죽었다 하여 뱀소라 부른다. 그리고 호리병을 닮았다는 병소를 보고 발길을 돌린다. 아직 병풍소와 제승대 간장소가 남았지만 와운마을 천년송에 들르기 위해 부득이 했다. 되돌아 내려오다가 우측으로, 그 깊은 산속에 있는 포장도로를 쉬엄쉬엄 걸어가면 와운 마을 천년송에 도착한다. 산이 사방을 둘러싸고, 청명한 하늘을 이고 있는 와운마을 천년송의 조망은 탁월하다. 산이 높고 골이 깊어 구름도 누워간다는 와운마을은 이름 그대로 비경이고 신비롭다.

와운마을 뒤, 뱀사골 상류 명선봉에서 뻗어 내린 산자락에 두 그루 소나무 서 있다. 천년의 침묵과 붉디붉은 용 비늘 나무껍질로 장엄한 기품을 풍기며, 할머니 할아버지 소나무가 그렇게 우뚝 솟아 있다. 오랜 세월의 비바람과 햇빛구름의 조화에 부대끼며, 천년의 나이테를 감추고 그렇게 하나의 붉은 구름으로 서있다. 참으로 경탄할 자태다. 천년송을 보다가 그 아름다운 뷰 포인트에 탄복하며, 두루두루 사방을 거듭 조망한다. 여기에 더 이상 무슨 말이 있어야 하겠는가. 이제 돌아 갈 길만 남았다. 뱀사골 입구 반선으로 내려오면서, 나는 우리의 용 전설과는 다른 터키의 현대소설 ‘위험한 동화’를 생각해 냈다.

내용은 이렇다. 옛날 터키에 왕과 왕비가 살았다. 오랫동안 자식이 없어, 천신만고 끝에 신에게 빌어 자식을 얻었지만, 뱀 왕자였다. 세월이 흘러 뱀 왕자가 성장해 결혼을 시켰지만, 첫날밤 신방에 들어간 모든 신부는 뱀 왕자에게 물려 죽었다. 그러하다가 그 나라에 마음씨 착한 소녀가 있었는데, 그 소녀를 미워한 의붓어미가 억지로 뱀 왕자와 약혼시켰다. 소녀는 첫 날밤 신방에서 자신이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어머니 무덤 곁에서 슬픔에 잠겨 울고 있을 때 소녀 앞에 흰 수염의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소녀에게 뱀 왕자에게 물려죽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신방에 들어갈 때, 마흔 겹의 저고리를 입으라고. 그리고 뱀이 너에게 벗으라고 하면 첫 번째 저고리를 벗고 나서 너도 그에게 ‘당신도 허물을 벗으세요. 뱀 왕자님’이라고 해라. 두 번째 저고리도 그렇게 해서 벗고 이렇게 해서 마흔 번째 허물을 벗게 해라. 그러면 잘 생긴 왕자로 변할 것이다. 드디어 결혼식이 끝나고 둘은 신방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옷을 벗게 되었는데, 자신이 저고리를 하나 벗고, 뱀 왕자가 허물을 하나 벗게 하고, 자신이 저고리를 두 개 벗고, 뱀 왕자가 두 번째 허물을 벗게 하고, 이렇게 하여 마흔 번째의 허물을 벗은 뱀은 아주 잘생긴 왕자로 변하고, 이 둘은 오래오래 잘 살았다.

이 내용은 우리에게 감흥과 함께 비례의 저울추가 균형을 이룰 때, 서로를 잘 살 수 있게 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큰 의미를 준다. 뱀사골에서 뱀 이야기가 많이 나오니까 생각이 났다. 현대인은 모두 마흔 겹보다 더 많은 허물을, 저고리를 입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이제 서로에게 마흔 겹보다 더 많은 허물을 벗고, 저고리를 벗고, 위선과 거짓을 벗고, 맨살로 스킨십 하는 진실의 세계에서 상생해야 한다고, 나 혼자 생각한다. 시인·대구힐링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김석 대우여행사 이사

☞여행정보

▶트레킹 코스 : 반선 - 뱀사골 탐방 안내소 - 석실 - 요룡대 - 탁용소 - 뱀소 - 병소 - 요룡대 - 와운마을 천년송 - 석실 - 반선 ▶문의: 지리산 국립공원 북부사무소 (063)630-8900

▶내비 주소 : 전북 남원시 지리산로 842-8 ▶주위 볼거리 : 송흥록 생가, 구룡폭포, 실상사, 벽송사, 백장암, 황산대첩비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