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의 고장 청송 .20] 송암 김인환 박사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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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24   |  발행일 2018-10-24 제13면   |  수정 2018-10-31
‘통일벼’ 농가 보급·확대 주도…굶주림 해결 일등공신
20181024
청송군 송생리 청송군농업기술센터 옆 소공원에 자리한 김인환 박사 공적비. 청송군 현서면 월정리 출신인 김인환은 농촌진흥청장을 지내며 통일벼 확대 보급을 주도, 한국 농업의 녹색혁명을 이끌었다. 작은 사진은 김인환 박사의 생전 모습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50원짜리 동전에는 탱글탱글한 벼이삭이 고개 숙이고 있다. 그것은 1960년대 UN식량농업기구(FAO)가 창설되면서 식량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기 위해 각국에 식량을 소재로 한 동전 발행을 권고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나라는 1972년 50원짜리 동전을 발행하면서 우리에게 최초로 식량문제를 해결하게 해 주었던 쌀 ‘통일미’를 담았다. 일명 ‘기적의 볍씨’라 불렸던 통일미. 거기에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이후 식량난과 식량의 자급을 위해 밤낮없이 노력했던 연구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송암(松岩) 김인환(金寅煥) 박사가 있었다.

#1. 청송 출생 김인환

김인환은 1919년 12월17일 청송 현서면 월정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아버지는 김상의(金相儀), 어머니는 신남(申南)이다. 그는 1938년 안동공립농림학교 농과를 졸업하고 이어 수원고등농림학교 농학부에 입학해 1941년 졸업했다. 같은 해 일본 규슈제국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농학부 농학과에 입학해 1943년 졸업했다. 그러나 곧바로 학도병에 끌려 입대해야 했고 광복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과거 우리나라는 늘 쌀이 부족했다. 1900년대 초 이전은 정부의 농작물 개량사업이란 아예 없었고, 농가에서는 하늘만 쳐다보며 낮은 수확량의 재래종을 키우는 것이 벼농사의 전부였다. 근대화된 벼 품종개량의 초석을 마련한 것은 1906년 일제가 수원에 권업모범장(현 국립식량과학원)을 설립하면서다. 이후 육성된 품종의 보급으로 쌀 생산은 획기적으로 증가했지만 일제의 지속적인 쌀 수탈로 우리 국민은 여전히 배를 곯아야 했다. 또한 일제는 일본인 전문가에 의해 일본을 위한 벼 품종개량사업을 수행했을 뿐 우리의 벼 육종(育種) 전문가나 중견인력은 단 한 사람도 양성하지 않았다.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온 김인환은 대구농업전문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고 이어 경북대 농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 양성에 주력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혼란과 격동 속에서도 건국 이후 처음으로 인력 불모지의 벼 육종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곧 닥쳐온 6·25전쟁은 벼 품종개량 사업의 초창기 기반을 다시 황무지로 만들어 버렸다. 정부는 벼 품종 육성 기반을 재정비해 나갔고 1957년에는 농촌진흥청의 전신인 농사원을 설립한다. 이듬해 김인환은 농사원의 연구기획과장으로 임명되었고 1960년에는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에서 1년간 연수를 받았다. 이후 1962년 농촌진흥청의 발족과 함께 시험국장으로 근무했다. 1964년부터는 농림부의 농업생산국장, 농정차관보를 지내다가 1968년 농촌진흥청장에 임명된다.

#2. 통일벼의 탄생

보릿고개를 넘으며 초근목피로 연명했던 시절은 아주 오래전이 아니다. 400만명에 육박하는 해외동포의 유입, 6·25전쟁 때 남한으로 넘어온 많은 월남민들, 그리고 전쟁으로 영농을 포기하면서 황폐해진 농지 등으로 식량부족은 점차 심화됐다. 식량 자급은 당시 농정의 최대 목표였다. ‘쌀 아끼기 운동’에서부터 ‘분식 장려’ ‘일주일에 하루 쌀 안 먹는 날’ 지키기, 곡식 한 톨이라도 축내는 ‘쥐잡기 운동’, 쌀막걸리 제조 금지 등 별별 묘안이 다 나왔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그 당시 정부와 연구자들의 꿈은 주먹만 한 쌀알이 열리는 다수확 품종의 개발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김인환이 농촌진흥청 시험국장으로 있었던 1964년, 허문회(許文會) 교수를 중심으로 한 서울대 농대 육종연구팀과 시험장의 연구진으로 구성된 특별 연구팀이 필리핀에 있는 국제미작연구소(IRRI)로 파견됐다. 목표는 한국의 기후와 토양에 맞는 기적의 쌀을 생산하는 것이었다. 연구팀은 3년의 노력 끝에 전 세계의 벼 육종가들이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 1967년에 탄생한 ‘IR667’ 바로 ‘통일벼’다.

그러나 통일벼의 농가 보급 여부를 최종으로 확정하기까지는 4년간의 검정시험이 더 필요했다. 특히 김인환이 국장 재직 시절의 농촌진흥청장은 통일벼를 반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통일벼 이야기는 꺼내지 못하게 하고 작물 시험장에도 일절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때문에 연구진은 통일벼를 시험장의 구석진 곳에 배치하고 대외비로 관리하면서 외부 노출을 억제해야 했다. 통일벼는 1968년 김인환이 농촌진흥청장으로 부임하면서 빛을 보게 된다. 김인환은 허문회가 개발한 품종을 적극적으로 육성할 것을 지시하면서 농가에 급속히 보급시켰다. 통일벼의 보급으로 수확량이 오르자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그러나 통일벼는 재배과정 중 냉해에 약했다. 게다가 ‘밥맛이 없다, 낟알이 쉽게 떨어진다, 키가 작아 볏짚을 이용하기 어렵다, 비료 사용량이 증가한다’는 많은 문제점이 나타났다. 이러한 문제들은 통일벼의 재배 기피로 이어졌다. 그러나 국가적인 쌀 부족 해소를 위해서는 양적인 생산이 우선이었다. 김인환은 통일벼의 확대 재배를 고집스럽게 추진해나갔다.

#3. 쌀 자급의 성공으로 녹색혁명을 이루다

김인환은 양적인 생산이 우선임을 강조하면서도 통일벼에 대한 생산자나 소비자의 부정적인 반응을 간과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1971년부터 통일벼의 단점 개선을 위한 품종육성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관련분야 인력 전체가 투입된 최우선 순위의 대형 핵심과제였다. 연구에는 인내가 필요했다. 김인환은 냉해 극복을 위한 ‘보온 묘판비닐’을 만들어 모내기 시기를 앞당기는 아이디어 등 문제 해결책을 직접 제시하며 결점을 보완시켜 나갔다.

그리고 1974년 가을, 통일벼의 단점을 개선시킨 연구 성과물 1번으로 ‘유신(維新)’을 선발하였다. 유신은 다수성으로 밥맛과 쌀 품질이 통일벼에 비하여 월등했다. 당시 유신 육성을 가장 반겼던 사람은 김인환이었다고 한다. 수많은 난제로 고심했던 그에게 유신은 큰 용기와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조생통일’ ‘통일찰’ ‘밀양21호’ ‘밀양23호’ 등 통일벼의 후계 품종이 다양하게 개발돼 전국 논의 대부분이 통일형 품종으로 채워지기에 이른다. 이들 품종을 보급하는 시기에는 한밤중에 자다가 비오는 소리만 들어도, 찬 기운만 살짝 느껴도 김인환은 벌떡 일어나 밖에 나가 하늘을 쳐다보며 마음을 졸였다고 한다. 그리고 1977년 마침내 쌀 생산량이 국내 수요를 초과하였고, 정부는 ‘녹색혁명 성취’를 선언했다. ‘분식의 날’이 폐지되었고 14년 만에 쌀막걸리가 다시 등장했다.

김인환은 1980년까지 무려 12년간 농촌진흥청장으로 있으면서 통일벼의 보급과 증산 시스템의 구축을 책임졌다. 이후 그는 국제미작연구소 이사, 사단법인 한국종묘협회 회장, 농촌진흥청 농진회장을 맡아 일했다. 그리고 1960년과 1963년에 홍조소성훈장, 1972년에 황조근조훈장, 1975년에는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김인환은 1989년 1월27일 세상을 떠나 수원에 있는 옛 농촌진흥원 안 여기산 남쪽 자락에 묻혔다. 그는 2014년 ‘농업기술 명예의 전당’ 첫 헌액 대상자로 선정되었고 청송읍 송생리에 위치한 청송군농업기술센터 소공원에는 그의 공적비가 서 있다.

물론 통일벼는 우리나라 재배여건에 부족함이 있었고 생산자와 소비자를 완전히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농학과 농업의 발전사에 한 획을 그은 업적이었고, 한국 과학의 10대 성취 중 하나로 꼽힌다. 통일벼의 표준 초형 모델은 새로운 품종 육성을 위한 동력이었고 우리 쌀 자급과 농업기술 발전의 초석이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역사에서 ‘보릿고개’는 없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 참고=김인환, ‘한국의 녹색혁명’, 농촌진흥청, 1975. 월간중앙, ‘한국을 바꾼 100인’, 중앙일보, 199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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