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주 운곡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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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19   |  발행일 2018-10-19 제36면   |  수정 2018-10-19
마지막 푸른빛 뿜는 압도적 자태 은행나무 곁 다소곳한 ‘유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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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정과 350년된 은행나무 압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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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정이 자리한 용추대 아래 청수. 작은 폭포와 무시무시하게 아름다운 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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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서원으로 가는 길. 높직한 석축의 가장자리를 따라 길게 계단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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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서원의 북쪽 담장. 담장 앞에 한 그루 대추나무가 열매를 잔뜩 흩뿌려 놓았다.

아니 벌써 추수철인가. 경주의 노란 들판 한가운데에 듬성듬성 벼들이 누웠다. 들만이 고요하고, 여느 때처럼 경주의 길에는 차들이 많다. 벅적한 시내를 관통해 북쪽으로 향하자 다시금 들판이다. 천북면의 노란 들판 위에 동그란 애드벌룬이 떠있다. 아마 보문호 언저리에서 쏘아 올렸을 걸로 짐작된다. 백미러 속으로 공기 같은 그것이 점점 작아지다 사라진다. 화산리 버스정류장을 지나면서 길은 아늑해진다. 불고기가 유명한 곳, 곳곳에 불고기집이다. 킁킁, 불고기 냄새는 나지 않고 성마른 가로수들은 벌써 빈 몸이다.

천북면 노란 들위로 보문의 애드벌룬
서원 가는길 석축따라 길게 뻗은 계단
너른대지 오리발 닮은 나뭇잎 압각수
순흥 금성단서 가지 하나 옮겨와 심어
말라 살수 없다 했지만 거대하게 뻗어
정자 앞 빼곡한 대숲과 대단한 물소리

◆ 구름계곡의 운곡서원

자그마한 유료 낚시터에 홀로 앉은 한 사내의 등이 보인다. 빈 몸으로 와 무엇을 낚으시나. 잠시 후 커다란 왕신 저수지가 펼쳐진다. 물가에 낚시꾼들이 빼곡하다. 온갖 장비들이 그들의 결연함을 웅변한다. 저수지 끝자락에서 물길 따라 산으로 든다. 왕신리(旺信里) 청수골 용추계곡이다. 아마도 성성한 믿음의 마을, 푸른 물의 골짜기, 용이 꿈틀대는 계류이겠거니. 쟁쟁한 물소리와 함께 더 더 깊이 산으로 든다. 구름계곡(雲谷)으로.

시원시원하게 너른 주차장이다. 방문객이 많다는 의미겠다. 역시 차들이 제법이다. 이리 넓어도 11월 중순이면 차 댈 곳이 없다 한다. 어린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안동권씨(安東權氏) 종친회에서 이곳을 방문해 심었다는 표석이 있다. 이곳은 운곡서원(雲谷書院)이다. 안동권씨 시조인 고려 공신 태사공(太師公) 권행(權幸)과 조선시대의 죽림(竹林) 권산해(權山海), 구봉(龜峰) 권덕린(權德麟)을 배향한 곳이다.

높직한 석축의 가장자리를 따라 길게 계단을 오른다. 마당에 빨래가 널린 한옥 살림집을 지나자 운곡서원의 북쪽 담장이 길게 드러난다. 담장 앞 한 그루 대추나무가 열매를 잔뜩 흩뿌려 놓았다. 서원은 보수 중이다. 외삼문 앞에 기와편이 언덕으로 쌓였다. 담장이 높아 내부는 보이지 않고, 비계 뼈대에 둘러싸인 지붕들만 환자처럼 온순하다. 운곡서원은 정조 8년인 1784년에 건립하여 추원사(追遠祠)라고 했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는데 1903년에 단을 설치하고 재사(齋舍)와 전사청(典祀廳)을 지어 향을 올리다가 1976년에 복원했다. 동재와 서재, 강당인 정의당(正懿堂), 묘우인 경덕사(景德祠)가 차례로 위치한다.

◆ 은행나무 압각수

서원의 남쪽은 꽤 너른 나대지다. 원래 이곳은 신라시대 밀곡사(密谷寺)라는 절집이 있던 터라 한다. 삼문 앞에서부터 저 멀리 대지의 가장자리 즈음에 서 있는 한 그루 은행나무가 보인다. 튼튼하고 균형 잡힌 몸통이 올해의 마지막 푸른 잎을 싱싱하게 매달고 있다. 압도적인 모습이다. 은행나무는 나뭇잎이 오리 발을 닮았고 가지가 오리 다리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압각수(鴨脚樹)’라고 한다. 한 가을날 주차장이 빼곡해지는 이유가 이 나무 때문이다.

영주 순흥에 수령 천년이 넘은 압각수가 있다. 옛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부르기를 ‘순흥이 죽으면 이 나무도 죽고, 이 나무가 살아나면 순흥도 살아난다’고 했다고 한다. 나무는 금성대군이 조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하고 순흥이 초토화되었을 때 불에 타 죽었다. 이후 200여 년을 죽은 듯이 있다가 밑동만 남은 나무에 가지와 잎이 돋아나더니 숲처럼 자랐다 한다. 이후 1682년 순흥은 복향되었다. 2년 뒤에는 단종의 왕호가 회복되었고 사육신도 복권되었다. 순흥 사람들은 압각수 아래 금성단을 설치해 곧고 정의로운 사람들을 기렸다. 운곡의 압각수는 순흥 금성단 압각수의 분신이다. 순흥에서 압각수 가지를 가지고 와 이곳에 심은 이는 갈산(葛山) 권종락(權宗洛)이다.

갈산의 선조인 죽림 권산해는 성삼문(成三問) 등이 옥에 갇히자 투신 자결한 인물이다. 그로 인해 이후 관직이 삭탈되었고 가족들은 변방으로 옮겨 살아야 했으며 자손들을 100년 동안 벼슬하지 못하는 형벌을 받았다. 사육신의 복권을 접한 갈산은 정조대왕에게 선조의 복권을 눈물로 호소했다. 결국 권산해는 1789년 복권되어 금성단에 배향되었다. 그때 갈산은 금성단 압각수의 가지 하나를 이곳 운곡에 심었다. 주위 사람들이 가지가 너무 말라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 은행나무는 거대하고 성성하다. 은행나무 곁에 담장으로 둘러싸인 정자 하나와 작은 꽃 마당을 가진 한옥 찻집이 있다. 찻방에는 한 여인이 문설주에 기대 앉아 먼 데를 바라보고, 마당에는 사내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 나눈다. 한 아이가 화단 주변을 졸망졸망 뛰어다니고 아기를 업은 아빠가 느긋한 걸음으로 아이를 따른다.

◆ 유연정

정자는 운곡서원의 부속건물인 유연정(悠然亭)이다. 정자의 이름은 도연명의 시 ‘음주(飮酒)’에서 왔다.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를 따다가(採菊東籬下) 아득히 남산을 바라본다(悠然見南山)’는 유명한 시. 국화를 따 차를 만들었을까 술을 빚었을까. 찻집의 꽃 마당에 국화 핀 연유가 시인에게 있을까. 찻집을 바라보며 난 협문을 들어서면 곧바로 정자의 옆얼굴과 마주한다. 큰 문, 작은 문, 벼락닫이 창이 오밀조밀하다. 작은 문을 열어 손님을 뵈었을 게고, 바람이 창을 벼락처럼 흔들면 주인은 오수에서 깨어났을 게다. 큰 문에 ‘문 열지 마시오’란 푯말이 붙었으니 그것이 정자로 오르는 길이겠다.

유연정이 앉은 자리는 용추계곡의 용추대라 한다. 정자 앞 벼랑에 대숲이 높고도 빼곡하다. 하여 저 아래 계류는 보이지 않지만 물소리가 대단하다. 정자는 조선 순조 11년(1811)에 건립됐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가운데와 오른쪽에는 크고 작은 방을 두고 왼쪽은 통간이 마루다. 대청에는 골판문을 달았고 전면 마루에는 난간을 둘렀다. 정자는 스스로 깊고 아늑하게 앉아 물소리 들으며 대청 창 가득한 압각수 곧은 몸을 바라본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경부고속도로 경주IC로 나와 직진한다. 배반네거리에서 좌회전해 7번 국도를 타고 포항방향으로 가다 신당교차로에서 우회전해 925번 지방도를 타고 간다. 천북면 소재지에서 화산불고기단지 방향으로 가면 화산리, 왕신저수지를 지나 오른쪽에 운곡서원으로 가는 계곡입구가 있다. 서원 초입에서 청화정 방향으로 조금 가면 유연정 아래 폭포와 소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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