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영남일보 책읽기 賞] 대학·일반부 최우수상 이지후 ‘파과’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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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18   |  발행일 2018-10-18 제24면   |  수정 2018-10-18
“아직 남아 있을 당신과 나의 유통기한…내 삶의 기억들을 톺아본다”

여름이면 엄마는 복숭아로 병조림을 만들곤 했다. 새벽에 차를 몰고 과일 시장까지 달려가서는 손수 몇 박스씩 골라오는 유난을 떨었다. 대대적으로 병조림을 담그는 날이면 엄마는 어린 내 손에도 칼을 쥐어 주었다. 이렇게 단칼에 큼직하게 잘라야 하는 거야. 엄마와 나는 마주 앉아 수백 개의 조각들을 잘라냈다. 병조림이 유통기한을 늘려주는 담장의 방식임을 들었을 때 나는 복숭아가 싫어지려고 했다. 그렇게 빨리 물러지는 습성만 아니면 이런 고생도 할 필요없잖아. 날 선 불만은 병조림을 하나 따면 이내 입 속에서 허물어졌다. 엄마가 늘린 유통기한 덕에 겨울밤까지 혀끝이 달았다.

그 남자는 작업을 한답시고 ‘중경삼림’을 들먹였다.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내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어. 나는 풉 소리를 내며 웃었다. 왜 웃어? 진심인데. 기억이 통조림이라면 영원히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 엄마가 남긴 기억 때문인가. 통조림을 들먹이는 대사엔 웃기게도 웃음이 안 나왔다. 아무리 오래 먹고 싶어 해도 유통기한이 없는 통조림은 없었으니까. 유통기한이라는 시간적 한계를 인식하고 그걸 연연해하던 사람들을 나는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 말은 나도 한계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건데. 그 때문인지 그 사람들은 이제 내 곁에 없다. 서로가 유통기한의 의미를 인식하는 부류란 걸 간파했을 때 즈음 나는 연애를 시작했던 것 같다. 남자는 내가 아프다고 할 때마다 먹을 것을 잔뜩 사다 주고 갔는데 마지막으로 사다 준 것들 중엔 코코넛도 있었다. 그걸 과일 칸에 넣으면서 무겁고 먹는 법도 귀찮은데 이런 건 뭐 하러 사왔대? 나는 툴툴거렸다. 뒀다 나중에 먹어. 단단하게 생겼으니 오래가지 않을까? 남자는 나를 달랬다. 넣어뒀단 사실조차 잊은 채 시간이 흘렀고, 이별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동안 코코넛은 내내 냉장고 속에 있었다. 어느 날 장봐온 걸 넣으려고 냉장고를 열었을 때, 그곳에는 흉물스럽게 변한 한때의 기억이 엉망진창으로 썩어 있었다. 파과(破果)였다. 나는 냉장고의 온도를, 영원한 유통기한 어쩌고 하는 사람을 믿지 않게 되었다.

구병모 작가의 ‘파과’는 오래전 엄마의 황도 병조림 같았고 헤어진 남자가 남긴 코코넛 같았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아프게 사라진 것들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그때 내가 잘라대던 여리고 무른 복숭아들은 내 칼날 끝에 고통을 느꼈을까? 냉장고 속에서 썩어가던 딱딱한 코코넛에게도 통증이란 게 있었을지. 산산조각을 낸다고 산산조각을 고스란히 다 얻을 수 있는 관계란 세상에 얼마나 될까. 내가 알면서 잘라냈거나 모르고 소외시켰을 모든 관계들은 시간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썩고 부식되어 갔을 것이다. 나 역시도 누군가로부터 잘려나간 한 조각의 사람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헛헛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 65세를 넘긴 이 할머니 킬러는 어째서 이름마저 ‘조각’인 건지. 덕분에 나는 그녀의 칼날이 지나는 길목마다 서글픔으로 조각조각 흩어지는 인생의 비의를 느껴야 했다. ‘방역’이라는 꽤 위생적인 이름으로 가장해, 청탁 받은 암적인 존재들을 제거해가는 청부살인업자. 썩고 곪은 사회의 한 조각을 잘라내는 것으로 새로운 사회를 조각해가는 것이 직업인 여자. 사랑한 남자를 따라 킬러가 되었으나 먹다 남은 과일 조각처럼 아무렇게나 혼자 남겨진 여자. 여자라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늙고 망가져버린 여자. 이 여자는 마치 최대한으로 늘린 유통기한마저도 끝나가는 복숭아 병조림 같았고, 아무리 굳건한 척 해도 냉장고 구석에서 말 없이 썩어가는 코코넛 덩어리 같았다. 거의 다 허물어진, 이제는 버려질 일만 남았을 한 조각의 과육 같은 생. 나는 그 의미의 실루엣을 소설 속 ‘조각’에게서 읽고 말았는지 모르겠다.

해마다 달력에는 여름이 들어있듯 누구나의 인생에도 뜨거운 한 시절이 있다. 아무리 냉혈한 같은 킬러일지라도 뜨거운 애정의 대상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다. 조각은 어쩌면 그 애정의 힘으로 냉정한 킬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이 주는 기쁨의 감정은 우리에게 책임을 요구하니까. 조각은 버려져 떠돌던 자신을 발견하고 키워준 류에 대한 애정으로 킬러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해간다. 그 완성의 과정에서 투우의 아버지를 죽이게 되고, 어린 투우에게 약을 먹이다 자신의 얼굴을 노출하는 미완성 킬러의 모습을 보이고 만다. 아주 작은 흠집 하나가 과일 전체를 썩어가게 하듯이, 조각은 자신의 삶 깊숙이 은밀한 자상을 내려는 투우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다. 우리의 내면에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는 칼날은 이제는 가닿을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지나간 삶에 대한 어떤 기억이 아닐까. 조각에 대한 투우의 복수는 투우(鬪牛)의 그것처럼 목표 지향적이고 저돌적이었지만, 그 역시도 상처 입은 유년의 기억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살아온 기억으로 인한 몸부림은 조각도 마찬가지였다. 가족에게 버려지고 류까지 잃으며 혼자가 된 조각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늙은 유기견인 무용을 거둔다. 잠깐 동안의 위안은 개를 유용한 존재로 느끼게 했을지 모르나 결국 개는 죽고 이름처럼 무용(無用)한 존재로 전락한다. 아무리 애정을 쏟고 위안을 얻는다 해도 개는 사람이 될 수 없고, 무용은 류의 대체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직업적으로 살인을 하며 살아온 조각이 유기견을 거두고, 다친 자신을 치료해준 강 박사의 딸을 구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을 때, 그녀는 이미 냉정한 킬러의 초상이 아닌 감정이 있는 여자이고 피가 흐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무엇이 그녀의 내면을 변하게 만든 것일까? 그건 혹시 살아온 모든 날들의 사건, 기억, 상처 같은 것들은 아니었을까. 그녀에게 그 칼날들을 내밀하게 들이댄 건 아마도 시간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건 결국 시간이니까. 그 시간의 힘으로 성장한 투우의 공격은 아스라이 멀어져있던 어떤 기억으로부터 조각을 소환시킨다. 그래서 “네가 바로 그 애구나”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라고 중얼거리던 조각의 모습은 그녀를 이미 시간의 칼날에 허물어진 한 알의 파과(破果)이자, 삶이라는 단도에 조각나 버린 파과(破瓜)로도 읽히게 한다. 살아온 만큼 상처입고 타인의 상처를 목격하며 자신의 상처를 추슬러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모든 과정들이 그녀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 미세한 변화 속에서 삶은 서서히 그 존재 이유를 드러낸다. 조각은 자신의 육체적 사회적 내면적 변화 앞에 그냥 절망만 하고 있진 않는다. 한쪽 손이 없지만 남은 손의 손톱을 공들여 다듬고, 곁에 아무도 없지만 다시 주어진 남은 날들을 살아간다. 이 할머니 킬러는 자신의 생에 칼을 꽂은 모든 불행을 자신의 인생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바로 그런 모습에 작가의 의도가 숨어있는 게 아닐까. 모든 변화가 변질인 건 아닐 것이다.

삶은 매순간 끊임없이 부정적인 어조로 우리를 설득해간다. 당신은 이 세상에 떨어진 한 조각의 남루한 인생일 뿐이며, 아무리 싱싱한 과일도 끝내는 힘없이 허물어지듯 당신의 삶도 유한한 시간의 끝에 파멸하고야 말리라고. 이 잔인한 설득의 담당자는 언제나 시간이다. 시간의 구속 앞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살아간다는 건 수없이 날아드는 킬러의 순간적인 공격을 받고도 죽지 않고 꿋꿋이 버텨내는 일이 아닐까. 한때 우리를 상처 입힌 기억과 싸우고 지금 우리에게 생채기를 내는 현실과 싸우는 일. 지금 이 삶의 유통기한도 반드시 끝이 있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 그 앎이 주는 허무함과도 싸워내야 한다. 그 싸움이 냉장고 속에서 존재를 견디는 파과(破果)의 시간처럼 우리를 외롭고 고독하게 만들지라도, 남아 있는 시간과 상실감 속에서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조각이 젊은 날엔 한 번도 다듬지 않던 손톱을 다 늙은 후에야 다듬어 보았듯이, 삶의 진정한 의미도 삶이 얼마간 망가진 다음에야 비로소 다듬게 되는 뒤늦은 깨달음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왜 깨달음은 언제나 뒤늦게 찾아지는 걸까. 책을 덮고, 어두운 냉장고에서 홀로 허물어지고 있을 내 삶의 기억들을 조용히 톺아본다. 얼마인지 모르지만 아직 남아 있을 당신과 나란 존재의 유통기한에 대해서도.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던, 그러니 ‘지금,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라던 작가의 말이 예리한 칼날이 되어 내 가슴에 박혀 있다. 지금도 허물어지고 있는 이 한 조각의 삶이 죽어가는 동시에 살아내는 파과의 시간임을 생각한다. 냉장고 밖에서는 매미가 운다. 어느덧 여름이 가고 있다.


20181018

■ 수상 소감 “과분한 격려 불빛 삼아 주어진 시간 잘 걸어갈 것”


그렇게나 무더웠던 여름이 저만치 가고 없는 것을 봅니다. 어쩐지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겨울이 어느덧 이만치 다가와 있는 것도요.

가고 없는 것과 지금 있는 것, 먼 데서 오고 있는 것들 사이에 놓인 시간을 한 발짝씩 내디디며 간신히 걸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어깨 너머로, 그 사람들의 진지하고 성실한 걸음걸이를 지켜보는 일이 제게는 가장 좋은 독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 속에 저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어떻게든 무너지지 않고 제 삶의 중력을 꿋꿋이 견뎌준 시간의 가르침에 머리 숙입니다. 그 시간들을 정독하려 애쓰는 동안, 아마도 조금씩 키가 자라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직 설익은 생각의 등을 따뜻한 손길로 두드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과분한 격려를 손전등 불빛 삼아, 제게 주어진 암암한 시간을 무사히 잘 걸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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