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칼럼] 공동체 가치를 훼손시키는 기득권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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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17   |  발행일 2018-10-17 제30면   |  수정 2018-10-17
BTS의 외국팬들 한글사랑
문자로선 세계최고이지만
사대부는 정보독점 위해서
한글 보편화에 반대하기도
기득권의 욕심, 지금도 비슷
[수요칼럼] 공동체 가치를 훼손시키는 기득권의 저항
지현배 동국대 파라미타칼리지 교수

방탄소년단(BTS)이 한국어로 부르는 노래가 빌보드 차트에 오르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BTS 공연에 열광하는 소식을 접한다. 비틀스나 마이클 잭슨의 노래를 들으며 20대를 보낸 1980년대 학번들에게는 문화적 충격이다. 이달 초에 뉴욕 시티필드 스타디움에 모인 4만여 명의 관객이 방탄소년단을 향해 치켜 든 문구가 ‘고마워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줘서’였다. 영어 표기 ‘Thank you for teaching us how to love ourselves’가 한글 아래에 주석으로 표기된 것이 더 놀랍다.

한국 드라마나 한국 음식을 중심으로 확산되던 한류가 한국어 노래와 한글로 그 관심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던 지역도 빠른 속도로 지구 전역으로 퍼지고 있다. 산업화 시대에 소위 ‘국어 순화 운동’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국내 가요 등의 대중문화는 말할 것도 없이 지식인들의 대화나 글에서 외래어는 물론 외국어가 포함돼 한국어 정체성에 혼란을 주던 기억이 문득 새롭게 다가온다. 한국어의 위상이 이렇게 높아진 것은 세계 무대에서 한국의 경제·문화적 역할이 커진 데 기대고 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해외에 나가면 ‘일본인이냐’ ‘중국인이냐’ ‘한국인은 어느 나라 말을 쓰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그래서 최근 한국어로 하는 공연에 미국·유럽 사람들이 밤을 새워 줄을 서는 풍경은 낯설다. 한글로 쓴 응원 문구를 들고, 나아가 한국어를 배우려고 하는 현상을 접하며 한글의 가치를 다시 떠올린다.

한글은 문자로서 단연 세계 최고다. 글자와 소리가 1대 1로 대응하는 기능의 탁월성, 기계어로의 특장점을 지닌 원리와 체계의 과학성, 한국어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언어를 표기할 수 있는 사용의 범용성과 확장성, 누구나 쉽게 빨리 익힐 수 있는 배움의 용이성 등에서 세계 어떤 문자도 한글과 견줄 수 없다.

한글의 탄생은 세종의 위대함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한국어와 한국인에게 축복이었다. 그렇지만 탄생부터 자리잡기까지 한글의 운명은 순탄하지 않았다. 한글은 탄생 후에도 500년을 공식 문자로 지정받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은 한문으로 기록되었다. 선비들의 문집도 한문으로 기록되었다. 성균관은 물론 서당을 비롯한 교육기관에서도 한문으로 교육했다. 군주국가에서 절대군주가 주도해서 만들었지만 현실의 저항은 막강했다.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한 최만리의 상소는 잘 알려진 대로다. 당시 관료들은 목숨을 걸고 그것을 막으려 했다.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관료의 한 사람이었던 최만리조차도 한글의 우수성에는 동의했지만, 그것이 반대의 근거였다. 한글이 보편화되면 사대부와 관료의 정보 독점이 무너지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글 창제는 문자 기득권 체제를 흔드는 것이었다. 오늘날 국민에게는 이롭지만 재벌이나 고위 관료 등에게는 불리할 수 있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의 건국 이후에도 한글은 그것이 가진 가치만큼 지위를 누리지 못했다. 군주제의 수직적 가치관에 젖은 기득권은 공화제의 수평적 가치를 구현하지 못했다. 국회의원의 명패에서부터 관공서의 공문서, 언론사의 신문 지면, 학교의 교과서는 물론 계약서 같은 생활문서에 이르기까지 한글은 오랜 세월 온전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한국말을 쓰는 한국 사람이 한국어 표기를 한글로 하는 것은 당위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그것은 단순한 문자 표기에 그치지 않음을 ‘그들’도 알기 때문이다.

창제 후 575년을 뛰어넘어서 2018년으로 돌아와보면 남북통일과 동아시아 평화, 사립유치원 회계, 부동산 투기, 최저임금, 세입자 보호, 청년 취·창업 등에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것과 나만의 이익을 위한 탈·불법 사이에서 기득권의 저항은 여전하다. 하늘로부터 받은 재능과 부모로부터 받은 재산을 ‘나만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하는 데 사람들의 목청이 여전히 높다. 사다리가 사라져 개천에서 용 나기는 힘들고, 유리천장이 두터워지고 있다.지현배 동국대 파라미타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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