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가을이 깊어간다

  • 배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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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15   |  발행일 2018-10-15 제31면   |  수정 2018-10-15
[월요칼럼] 가을이 깊어간다
배재석 논설위원

10월, 소리 없이 가을이 깊어간다. 100여 년 만의 기록적인 폭염이 기승을 부린 지난 여름을 생각하면 올해 가을은 안 올 줄 알았다. 그래도 자연의 이치는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법. 그 기세등등하던 염제(炎帝)도 시간의 수레바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푸르던 나뭇잎은 어느새 하루가 다르게 색동옷으로 갈아입고, 높고 푸른 하늘은 가을이 절정임을 웅변한다. 바람에 출렁이는 코스모스와 그윽한 향기를 뽐내는 국화도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더한다. 누가 말했던가.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 희망과 설렘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비움과 그리움의 계절이라고. 봄이 인간을 시인으로 만들 듯이 가을은 인간을 철학자로 만든다고.

사계절 중에서도 가을은 유난히 따라붙는 수식어가 많다. 그 중에서도 가을은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로 통한다. 글자 그대로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뜻이다. 이 말이 처음 나온 것은 당나라 때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두보(杜甫)의 할아버지인 두심언이 북쪽 변방에 수자리하러 나가 있던 친구 소미도에게 임무를 잘 마치고 몸 성히 돌아올 것을 기원하면서 보낸 시에서 유래했다. ‘구름 고요한데 별이 불길하게 떨어지고(雲淨妖星落), 가을 하늘 높아지며 변방의 말은 살찐다(秋高塞馬肥), 말에 올라탄 장수는 칼을 휘두르고(馬鞍雄劍動), 붓을 놀려 곳곳에 격문을 띄운다(搖筆羽書飛)’. 여기서 나오는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라는 구절이 오늘날의 천고마비로 변했다.

알고 보면 ‘추고새마비’에는 아픈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예로부터 중국 북방에는 흉노족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봄부터 여름까지 말들을 잘 먹이고 훈련시켜 가을이 되면 덩치 크고 날쌘 말을 타고 중국 변방으로 쳐들어와 곡식과 가축을 닥치는 대로 약탈해 갔다. 수확기가 끝나자마자 농기구 대신 무기를 들어야 했던 한족에게 하늘이 푸르고 흉노족의 말이 살찌는 가을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처럼 천고마비에는 머지않아 전란이 닥쳐오니 풍요로움에 안주하지 말고 방비를 철저히 하라는 유비무환의 가르침이 담겨있다.

천고마비와 함께 가을은 흔히 ‘남자의 계절’로 불린다. 선선한 바람이 불고 가을이 깊어지면 유독 가을을 타는 자칭 ‘추남(秋男)’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우울해하고 슬픈 유행가 가사가 모두 내 이야기인 것만 같아 괜히 쓸쓸해지기도 한다. 소위 가을만 되면 도지는 계절성 우울증이다. 과학적으로도 어느 정도 입증된다. 즉 가을이 되면 여름보다 일조량과 일조시간이 줄면서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의 분비가 감소한다. 반면 우울감을 높이고 잠을 유도하는 멜라토닌 분비는 증가한다. 이런 호르몬 변화로 기분이 가라앉아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여기다 비타민D의 생성도 줄어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분비도 저하된다. 이럴 때 특효약이 바로 가을 햇볕이다. 햇볕 쬐는 시간을 늘리면 세로토닌 생성이 촉진되고 면역기능 강화에 필요한 비타민D도 축적돼 웬만한 보약보다 낫다. ‘봄볕은 며느리를 쬐이고, 가을볕은 딸을 쬐인다’는 옛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누가 뭐래도 가을철 가장 많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관용어는 역시 ‘독서의 계절’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1년 중 가장 책이 안 팔리는 계절이 가을이다. 오히려 무더운 여름의 책 판매량이 다른 계절보다 15%가량 많다고 한다. 가을이 나들이나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라 되레 독서에 소홀하다는 속설이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7국민독서실태 조사를 보더라도 지난 1년간 일반 도서를 1권도 읽지 않은 성인이 40%에 달한다.

느림과 여유로 대표되는 책읽기는 온갖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신에게 유용한 맞춤형 정보를 찾는 가장 빠른 길이다. 나아가 독서는 지식 창조의 근원이며 인간의 정신적 가치를 높여주는 원동력이다. 4차 산업시대 대한민국의 미래는 독서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올해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정한 ‘책의 해’다. ‘백가지 꽃의 향기가 독서의 향기에 미치지 못한다(百花爭比讀書香)’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마음을 살찌우는 책의 향기에 흠뻑 취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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