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의 뮤직톡톡] 비극적 삶 살다간 가요계의 여왕 윤심덕과 이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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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12   |  발행일 2018-10-12 제39면   |  수정 2018-10-12
[김명환의 뮤직톡톡] 비극적 삶 살다간 가요계의 여왕 윤심덕과 이난영
‘목포의 눈물’ 이난영.

한국가요사를 대표하는 여가수는 누구일까. 이번에는 가요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추억의 여성가수들을 소개하겠다.

1926년 국내에서 음반 녹음기술이 없었던 시절 조선 최초의 대중가수, 아니 최초의 인기 여가수가 있었다. 사실 그녀의 인기는 순수하게 노래로만 대중에게 알려진 게 아니고 김우진이라는 유부남 극작가와의 정사(情死)로 인해 순식간에 조선팔도에 퍼지게 된다.

1925년에 윤심덕은 극작가 김우진의 권유로 그 당시 최고의 무대인 토월회 무대에 출연했으나 크게 빛나지는 못했다. 당시 이런 작품들은 대중적이지도 않았고 설상가상 윤심덕의 키가 상대 남성배우들보다 커서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실의의 늪에 빠진 그녀에게 일본 오사카에 있는 니토레코드에서 녹음 제안이 들어왔다. 니토 스튜디오에서 동생 윤성덕(그녀는 음반을 녹음한 직후에 곧 바로 미국으로 유학)의 피아노 반주로 녹음을 마치고 돌아오는 연락선에서 대마도를 지날 무렵 연인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현해탄 격랑 중에 청춘 남녀의 정사(情死), 남자는 김우진 여자는 윤심덕, 극작가와 음악가가 한 떨기 꽃이 되어 세상 시비 던져두고 끝없는 물나라로’. 1926년 8월5일자 ‘동아일보’ 3면에 관련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요즘의 신문이나 검색 포털의 제목보다 훨씬 낭만적이며 자극적인 이 기사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삽시간에 그녀의 노래를 유명하게 만든다. 덩달아 그 비싸다는 축음기까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최초의 인기 가수라는 역사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너무나 기구한 운명이었으며 노래만 유언처럼 남겨지게 됐다.

[김명환의 뮤직톡톡] 비극적 삶 살다간 가요계의 여왕 윤심덕과 이난영

1935년 조선에서 목포를 가장 낭만적인 항구로 만들어 버린 노래가 등장한다. 바로 ‘목포의 눈물’이다. 호남지방은 조선에서 가장 큰 곡창지대인 동시에 목화 산지로도 유명했다. 목화의 목(木)에 항구의 포(浦)가 붙어 ‘목포’가 되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호남지방에서 생산된 쌀과 목화는 거의 전북 군산항과 전남 목포항에서 일본으로 보내진다. 조선의 농민들은 초근목피의 삶을 면치 못했다.

당시 조선의 항구는 요즘 항구와 다르다. 버스커버스커의 노래 ‘여수 밤바다’의 정서는 그 시절 항구의 정서와 너무나 상반된다. 낭만이 아니라 한이 머무는 공간이었다. 이 항구의 비애스러운 정한을 너무나도 잘 표현해준 여가수가 있다면 바로 ‘이난영’이다. 이난영은 윤심덕 못지않게 비극적 삶을 살다갔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가사를 보면 그 한이 절감된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20세기 초에서 삼백년을 빼면 대략 임진왜란 시기다. 노적봉은 이순신 장군이 노적가리를 쌓아 대군이 진치고 있는 것처럼 왜군을 속였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이렇게 가사 곳곳에 저항 정신이 녹아 있다. 발매 전 총독부 검열에 걸려 ‘삼백년 원한이 뭐냐’는 추궁을 당했다. 그는 원한이 아니고 ‘원앙’이라고 속여 연인의 이별을 노래했다고 둘러댄다. 작곡자 손목인의 재치로 원곡은 훼손 없이 발매될 수 있었다.

1916년에 목포에서 태어난 이난영. 참으로 운명적인 가수다. 16세 무렵 태양극단에 입단하면서부터 가수가 된다. 이난영이라는 예명은 극단장 박승희가 지어준다. 처음엔 막간 가수로 데뷔,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한다. 전세계에 불어닥친 대공황 여파로 일본 공연은 실패하고 악단도 해산한다. 절체절명의 이난영. 그런데 운명의 신은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OK레코드 이철 사장한테 발탁된다. 1935년 목포가 고향인 문일석이 노랫말을 짓고 ‘타향살이’로 유명한 손목인이 곡을 붙여 만든 ‘목포의 눈물’을 취입한다. 단번에 ‘가요계의 여왕’으로 등극한다. 이 노래만큼 목포, 아니 전라도의 정서를 노래한 곡도 드물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김해송. 하지만 월북해버렸다. 1965년 서럽게 타계했다. 고향에 묻히지도 못한다. 비련의 유해는 목포가 아닌 경기도 파주공원에 묻힌다. 하지만 목포시민의 정성으로 유해는 2006년 3월 목포시 산정동 삼학도로 이장된다.

재즈드러머 sorikong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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