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영원한 경승지 구례 사성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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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12   |  발행일 2018-10-12 제37면   |  수정 2018-10-12
속세 마음 내려놓고 올라 황금빛 구례들·섬진강에 넋 잃어
20181012
사성암 전망대에서 바라본 구례들과 섬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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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으로 물들어가는 사성암의 전경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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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면이 수려한 암벽으로 싸인 산왕전과 도선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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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측의 대나무 숲과 돌담길 사이로 보이는 나한전.

깎아지른 듯 아름다운 절벽위의 암자
약사불 계시는 큰 법당 약사유리광전
원효대사가 부어주는 자비로운 약병
길양옆 묵화같은 대나무 지나 나한전
수려한 암벽 둘러싸인 산왕전·도선굴
오산 정상 팔각정자 전망대 가을비경


가을은 복면가왕이다. 가을은 단풍과 황금빛 들판으로 자기 얼굴을 가린다. 그 망막에 그려지는 상을 따라 가면 거기에 몰입이 있다. 그러므로 가을은 늪이고 수렁이다. 그 아름다운 구례들과 지리산의 영봉들이 구름을 이고 있는 원경의 늪에 풍덩하는, 사성암 초입에서 나는 허우적거린다. 그것은 마치 수영하다가 마비가 와 수중으로 가라앉는 느낌과 비슷했다.

사성암은 오산 꼭대기에 깎아지른 듯 아름다운 절벽 위에 지어졌고, 큰 세발 기둥이 받치고 있어 사진으로 본 금강산 보덕암과 흡사하다. 무언가 아슬아슬하면서 아름답다. 곧 넘어질 것 같고,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운 광경에서 팽창하는 긴장감을 느낀다. 건축의 구조미란 이런 것인가 보다. 아찔한 풍경의 구도에 아름다움이 더 피어난다. 태고의 시간이 흐르는 큰 바위와 인간의 힘으로 지은 불당은 기막히게 어울려 신비하고 경이롭다. 게다가 가을이 공간을 채우면서 감정의 물꼬를 트이게 해 하염없이 흘러간다.

계단입구 ‘사성암, 육칠 계단 오르기 전 속세 마음 내려놓고 쉬엄쉬엄 올라가세. 삼분 찰나 정신일도, 삼배합장 마음공양, 지은공덕 영구하라’는 글에 이곳이 어떤 곳인가를 알아챈다. 가파르게 경사진 돌계단의 유별난 풍경을 딛고 오르면 귀목나무가 있다. 그 옆에 쉼터가 있고, 앉을 수 있도록 돌로 만든 좌석이 있다. 돌에 앉아 내려다보는 섬진강 줄기와 구례 들판이 절경이다. 환상의 뷰 포인트다. 가을 바람이 불어와 귀목의 잎이 흔들릴 때마다 하늘의 빛이 반사돼 무당의 하얀 이빨처럼 보인다. 신이 깃든다는 귀목나무, 안내판에는 그냥 귀목나무라는 글자만 있고, 그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얼마나 단순한가. 여기서 마음을 더욱 훌훌 털어 버리고, 약사유리광전으로 간다.

약사불이 계시는 큰 법당이다. 안에는 마애여래입상이 음각되어 있다. 20여m의 기암절벽에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선정에 들어 손가락으로 새겼다는 불가사의한 전설이 전해진다. 왼손에는 병든 중생을 고치려는 약병을 들고 있다. 그냥 암벽에 음각으로 새겼지만, 그 풍기는 신비한 분위기에서 전해지는 전설이 사실일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저렇게 중생을 위해 오로지 타인의 아픔을 없애는 것이 나의 아픔을 없애는 것이라고, 또 그렇게 하라고 암벽에 병을 치료하는 부처님까지 새겼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지금은 별의별 약을 대량으로 생산한다. 그럼에도 사람의 병은 더 심해지고 종류도 많아지고, 어이없게도 자기를 살려주는 자연까지 중병을 들게 한다. 원효대사가 우리에게 먹여주는 약병은, 마음 고쳐 먹으라는 약병이다. 마음 고쳐, 자연으로 돌아간 마음으로, 자연과 우리 생명을 끈으로 이어 공생하라는 약병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몸에 병을 없애주는 약병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러한 착각이 사성암을 유명하게 알리는 광고 전광판이 되기도 한 것이지만. 유리광전 앞은 바로 허공이다. 그것은 아래에서 본 바와 같다. 창문에서 보면 허공이 아찔하다. 절벽에 한 움큼의 풀을 쥐고 매달려 있는 기분이다. 여기서 한 발을 더 내디디면 중력장에 의해 땅에 곤두박질하고 생명은 끝나게 된다. 그야말로 백척간두다.

그러나 중력장이 없다면 나는 죽음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중으로 날아가게 되고,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게 된다. 수도자가 목숨을 내려놓고 정진할 때 바른 깨달음을 얻듯이, 유리광전도 중력장을 부정하고 허공과 하나일 때 영원한 아름다움을 가진다. 탐욕이라는 중력장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원효대사가 자비로운 약병을 부어 주신다. 그 약을 얻어먹고 착각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눈에 사성암은 영원한 극락으로 남아있게 된다. 시간을 잡아두고 역사에 그림이 되는, 영원한 건축이 유리광전이다. 장애가 없으면 어떻게 법열이 있겠는가. 아픔이 없으면 어떻게 즐거움이 있겠는가. 불교에서 우주는 장애고 아픔이다. 오로지 깨달음만이 그 장애와 아픔을 법열과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한다.

부처는 다름 아니고 깨달은 사람이다. 허공으로 더 나아갈 수 없는 장애에 아득해지며, 무애의 세계를 체험한다. 이러한 하염없이 떨어져 내리는 바닥 모르는 추락에서, 나는 나의 존재를 알게 되고 거리낌 없는 자유를 순간순간 느낀다. 참으로 법열을 분출하는 감정의 발원지를 찾았다고나 할까.

여기서 나한전으로 간다. 길 양편에 대나무 숲이 묵화처럼 있고, 마치 화선지의 빈 공간에 드리우는 적요처럼 나한전은 이미 깊은 선정에 빠져 있어 그냥 발길을 돌린다. 낭떠러지를 따라 난 작은 길옆에 아름다운 화강암 암벽이 있다. 소원바위다.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을 꼭 들어준다는 크고 아름다운 바위는 석기시대의 유전인자를 가지고 우리의 소원을 들어줄 것 같았지만, 청동으로 만든 선전물과 돌로 다듬은 관음보살상은 미간을 찡그리게 한다. 노란하트의 종이에 소원을 적어 줄에 걸어 놓았다. 몇 개 읽어보니 건강, 돈, 취직, 사랑의 내용이 거의 대부분이다.

어느 한 장에 이렇게 쓰여 있다. ‘오빠 술 좀 안 먹게 해주세요.’ 오빠의 술 때문에 얼마나 골병이 들었으면 이런 소원을 적었을까. 술도 사실 몰입이다. 술과 마약, 그 외의 중독은 모두 외적인 몰입이다. 이러한 중독성의 몰입은 파괴적인 몰입이고, 마치 바닷물을 마시듯이 마실수록 더 목마른 갈증의 몰입이다. 갈증에 대한 몰입은 악순환이고, 갈등이고 분쟁이다. 우리는 이제 자기에게 있는 보물을 찾아가는 내적인 몰입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의 내면은 외적인 것보다 더 크고 가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는 정신의 심층에 몰입할 때, 우리는 새로워지며 변화한다.

지장전도 보고, 삼면이 수려한 암벽으로 둘러싸인 산왕전과 바로 옆의 도선굴도 탐방한다. 산왕은 산신령이다. 산왕은 육신의 왕이 아니고, 신령의 왕이다. 산왕은 부모들이 자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잘 들어주신다고 한다. 부모의 자식사랑은 무조건적이다. 산왕은 세상 부모들의 전담의사인지 모른다. 이제 다시 길에 선다. 다른 전망대가 있어 멀리 구례들, 곡성들 아스라한 산 그리메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섬진강을 넋을 놓고 본다. 가을은 저 산야에 아름다움을 융단폭격하며 지나가는 것이다. 관광객들이 지나가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온다.

이제 오산 정상으로 걸어간다. 데크 계단을 지나고 산 오솔길을 걸어서 가을 바람에 마음을 펄럭이며 허청허청 걷는다. 오산 정상 팔각 정자 전망대에 도착한다. 사방팔방이 걸림이 없다. 헌걸찬 지리산의 영봉들, 종석대 노고단 왕시루봉 반야봉이 보이고, 문척면의 나들목인 신구 문척교, 몇 번이나 보았지만 눈 피로를 씻어주는 구례 곡성의 누런 들판, 보기만으로도 기분 좋고 즐거운 섬진강과 그에 대칭하는 가을 하늘의 푸른 질감과 각양각색의 하얀 구름을 보며 감탄하고 감동한다. 자라가 물을 마시는 형상을 한 오산, 중국 전설에 “자라가 등에 지고 다닌다는 바닷속의 큰 산”을 오산이라고 한다. 남도의 어떠한 전망대에서도 오산 정상에서 보는 일망무제의 비경을 따라잡기 어려울 것 같다. 저 멀리까지 뻗어간 둥주리봉 방향의 산줄기 물결인 능파를 따라가며 죽연 마을로 내려간다. 오늘 사성암 트레킹은 순수함(virgin)에 몰입한 시간이었다. 그 순수함이 우리 마음치료의 자연산 처방이었다.

글= 김찬일 시인 (대구 힐링 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 김석 대우여행사 이사

☞여행정보

▶트레킹 코스 : 죽연마을 - 사성암 들머리 - 귀목나무 쉼터 - 나한전 - 지장전 - 소원바위 - 산왕전(도선굴) - 전망대 - 오산정상 전망대 - 죽연마을 ▶문의: 전남 구례군 군청 (061) 782- 2014 ▶내비 주소 : 전남 구례군 문척면 죽마리 산 4 ▶주위 볼거리 : 운조루, 화엄사, 연곡사, 천은사, 도림사, 화개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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