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의 고장 청송 .17] 대한광복회 지휘장 권영만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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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03   |  발행일 2018-10-03 제13면   |  수정 2018-10-03
18세 연락병으로 의병활동 뛰어들어…‘우편마차 군자금 탈취’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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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진보면 광덕리 권영만의 옛 집터. 그가 살았던 집은 세월이 흘러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는 의병이었다. 또한 1910년대 국내 무장 투쟁을 선도했던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의 지휘장이었다. 그는 뜨거운 가슴으로, 냉정하고 명석하며 전략적인 머리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저함 없는 행동으로 싸웠고 결국 대한의 독립을 보았다. 세상은 그를 용맹하고 과감하며 전형적인 독립투사였다고 기억한다. 그는 권영만(權寧萬)이다.

#1. 의병·독립운동가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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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권영만.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권영만은 1877년 3월15일 영양군 입암면 사창(社倉)에서 태어났다. 사창은 원래 청송 진보의 북면 지역에 속해있던 땅이다. 마을 앞으로는 반변천이 흐른다. 선비들은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노나라의 사수(社水)를 생각하며 터전의 이름에 사(社)자를 넣었고, 또 그곳에 병기 창고가 있어 창(倉)이라 했다 한다. 문무가 합해진 이름이다. 사창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병옥(屛玉)이라 개칭되었고 입암면에 속하게 되었다. 병옥은 뒷산에서 옥과 같은 조그만 구슬이 나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사창은 현재 병옥리의 자연마을로 남아 있다.

권영만의 생년월일과 출생지는 기록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디지털청송문화대전에는 ‘1877년 3월15일 경북 영양군 일월면 도계리에서 태어나 영양군 입암면 병곡리에서 거주하다가 1922년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로 이주’한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 또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권영만의 본적은 청송, 생년월일은 1878년 1월17일’로 기록되어 있다.

권영만은 일찍부터 진보향교(眞寶鄕校)를 드나들었는데 훗날에는 향교의 남쪽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廣德里)로 이주하였다. 조부는 권수명(權秀明)으로 진보의 의병들을 규합하여 활약하다 체포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는 권인환(權寅煥)으로 독립 운동가였다. 권영만은 18세 때 연락병으로 의병활동을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907년에 의병항쟁을 펼쳤다’는 간략한 기록이 있을 뿐, 대한광복회에서의 활동 이전까지의 그의 행적은 대부분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약관(弱冠) 이후 계속 독립을 위한 음지의 길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순거(舜擧), 호는 각헌(覺軒)이다.

#2. 대한광복회에 몸담다

1915년 8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시회(詩會)가 열렸다. 모인 사람들 중에는 흰 두루마기 차림의 선비도 있었고, 검은 양복을 단정하게 입은 신사도 있었다. 그늘에 모여 앉아 시를 읊으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던 그들 가운데 권영만이 있었다. 시회는 위장이었다. 모임의 목적은 한국 독립을 위한 비밀 결사를 조직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한광복회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915년 설립된 비밀결사 대한광복회
의병출신 우재룡과 함께 지휘장 선임
세금 운송하던 일제의 우편마차 털어
거금 8천7백원 군자금으로 확보 기여

총독부 일본 수뇌부 암살기도 실패로
강도·공갈 혐의 쓰고 징역 8년 받아
광복 후 김구의 한독당 결성에도 참여



대한광복회의 총사령관에는 허위의 제자인 박상진(朴尙鎭), 지휘장에는 권영만과 의병 출신인 우재룡(禹在龍)이 선임되었다. 조직의 살림을 책임질 재무장관은 경주 최부잣집의 마지막 만석꾼 최준(崔浚)이 맡았다. 이어 8도에 지부를 두고 경상도에 채기중(蔡基中), 충청도에 김한종(金漢鍾), 황해도에 이관구(李觀求) 등을 각도의 지부장으로 선출했다.

‘지식이 있는 자는 서로 충정을 알리고 음(陰)으로 단결하여 본회가 의로운 깃발을 동쪽으로 향할 때를 기다려라. 그리고 재물이 있는 자는 각기 의무를 다하고 미리 저축하여 본회의 요구에 응하라. 나라는 회복할 것이요, 적은 멸망할 것이요, 공적은 길이 남을 것이다.’(광복회 포고문 중)

1910년대는 일제의 무단통치기로 민족운동 주체들이 해외로 망명하는 등 국내 독립운동이 매우 침체되어 있었다. 광복회는 국내 민족운동세력들을 규합해 무장투쟁을 준비했던 혁명단체다. 만주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 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들은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해 혁명기지로 삼았으며 비밀, 폭동, 암살, 명령의 4대 강령이 행동지침이었다. 이는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총독 및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당시의 국내 독립운동 단체인 독립의군부, 풍기광복단, 민단조합, 달성친목회, 조선국권회복단 등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들도 참여했다. 광복회 결성에 참여한 이들은 이념과 투쟁노선이 서로 달랐지만 독립이라는 목적 아래 연합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의병세력은 높은 의협심과 군사적 경험으로 대한광복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3. 우편마차 암습사건

1915년 12월, 대한광복회는 일제가 경주, 포항, 영일 지역에서 거둔 세금을 우편마차에 실어 경주에서 대구로 보낸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권영만과 우재룡은 그 세금을 군자금으로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송 전날, 권영만은 우편마차의 주인집에 숙박을 한다. 다음날 새벽 갑자기 병이 났다는 핑계로 주인에게 간청하여 우편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웅크린 권영만과 거금을 싣고 어두운 새벽길을 덜컹거리며 달렸다.

경주 시내에서 대구로 가는 길, 마차는 무열왕릉을 지나 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경주시 광명리 소태고개를 지나던 마차가 갑자기 균형을 잃고 뒤뚱거렸다. 그때 그곳에는 무장한 우재룡이 길을 파괴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가 머뭇거리는 사이 권영만은 8천700원이라는 거금을 확보한 뒤 뛰어내렸다. 세금을 운송하던 이들이 뒤돌아보았을 때 마차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군자금 확보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현재 소태고개에는 도로가 놓였고 의거의 자리에는 효현교(孝峴橋)가 새로 세워져 있으며 국가수호 사적지로 분류되어 있다.

우편마차 탈취사건 이후 권영만의 비밀활동은 여러 차례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18년 초 대한광복회 조직이 노출되고 만다. 많은 동지들이 일경에 체포되자 권영만은 한훈(韓焄), 우재룡 등과 만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승하하였다. 3월1일 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상해에서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권영만은 그해 여름 다시 국내로 들어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 모금을 이어나갔다.

#4. 애국지사로 기억되다

1920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을 받아 우재룡, 심영택(沈永澤) 등과 함께 국내 군자금 모집을 더욱 조직적으로 펴기 위한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했다. 그들은 군자금을 모아 해외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한편 만주에 있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밀령을 받아 총독부 수뇌부의 암살을 계획했다. 마침 미국 의원단의 내한이 예정되어 있었다.그것을 계기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 등 일본 고관을 암살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미즈노는 조선총독 다음 서열로 오늘날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계획은 실패했고 권영만은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그는 폭탄과 화약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무총감을 암살하려 했다는 소문이 떠돌자 일제는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라며 부정했다. 1922년 4월13일 경성지방법원은 그에게 징역 8년을 선고했다. 죄명은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강도, 공갈’이었다.

출옥 후 권영만은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한다. 대종교는 1909년 설립된 신흥 종교로 정치적 구국운동에의 좌절을 민족종교운동으로 전환한 단체였다. 그들은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항일투사 양성에 힘썼으며,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작성해 발표하였으며, 비밀결사단체인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발전시킴으로써 무장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시켰던 단체였다.

그리고 1945년 8월15일, 광복을 맞았다. 권영만은 대한광복회 재건을 위해 활동했다고도 하고 1947년 김구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독당(韓獨黨)의 결성에도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4월6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는 사망년월일이 1964년 10월1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국립묘지 선열묘역에 안장되었으며 비석에는 ‘애국지사 권영만의 묘’라고 새겨져 있다. 그의 옛집이 있던 곳은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 351-3번지(신한1길 31)’이다. 약 20mX20m의 땅 대부분은 밭이다. 그곳에 집은 사라지고, 온통 푸른 것들만이 파릇파릇 자라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참고=청송군지, 청송의병 사이버박물관 자료, 디지털청송문화대전 자료. 국가보훈처 자료, 국가기록원 자료, 청송문화원 자료, 영양군청 자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자료, 독립기념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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