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안시성’ 조인성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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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21   |  발행일 2018-09-21 제43면   |  수정 2018-09-21
“할리우드 ‘트로이’ 같은 젊은 장수 멋지게 완성…대작 부담감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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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과부적. 당태종 이세민이 이끄는 20만 대군과 맞선 안시성의 성주 양만춘과 5천명 군사들은 승산 없는 전쟁을 치르려 한다. 게다가 양만춘은 자기에게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개소문으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이 찍혀 있는 상태. 수도인 평양성의 마지막 관문이라는 지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연개소문이 “안시성은 포기한다”고 말했던 건 그런 양만춘에 대한 괘씸죄에서 비롯됐다. 지원군 하나 없는 고립무원의 안시성 성루에서 벌떼같이 모여든 당나라 대군을 바라본 양만춘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 하더라도 한 번 붙어 보겠다는 깡과 결기 그리고 애민정신 등 여러 가지 감정이 올라왔을 것 같다. 이길 수 있을 때만 싸우는 건 아니니까.” 9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 ‘더 킹’(2017)의 흥행성공으로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을 조인성이지만 역사극이 주는 무게감 앞에서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안시성’은 당나라 대군을 상대로 88일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양만춘과 안시성 군사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총제작비로 220억원이 투입된 대작이다. 미스 캐스팅이 아니냐는 항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조인성은 기존 사극에서 소비되던 모습이 아닌, 배우 조인성의 매력을 극대화시킨 젊고 카리스마 있는 외유내강형 장군상을 완성했다. 현대극에서 비쳐졌던 모습과 차별된 또 다른 ‘멋짐’이다. 양만춘과 안시성 전투에 대한 사료와 고증이 충분치 않은 터라 여느 때보다 많은 캐릭터 분석과 준비과정을 거쳤다는 조인성. “어떤 리더를 원하는지에서 출발했다”는 그는 “낮은 자세에서 뜨겁게 민중의 일을 하는 리더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노력 덕에 양만춘은 수십만 대군과 맞서는 담대함을 보여준 강인하고 용맹한, 그리고 슬기로운 인물로 21세기에 환생할 수 있었다. 기대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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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극에 최적화된 조인성의 이미지와 양만춘의 싱크로율이 과연 어떨지에 대한 흥미로움과 의구심이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멋지게 완성됐지만 그 과정에선 분명 많은 고민과 부담감이 있었을 듯하다.

“많았다. 일단 220억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의 타이틀롤을 맡았으니 그 부담감이 상당했다. 그런데 제작진의 지향점은 분명했다. 사극을 보통 올드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좀 더 젊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니냐’는 물음표에서 ‘안시성’은 출발했다. 고대사가 주는 엄숙함과 무거움이 있다. 대하사극을 보더라도 장군들은 대부분 50대에서 60대로 설정해 놓고 있다. 나 역시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감독님이 나를 보면 ‘슬램덩크’의 강백호가 연상된다는 거다. 그 이미지를 그대로 영화에 투영하면 굉장히 신선하고 새롭게 젊은 사극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시면서 우리도 할리우드의 ‘트로이’처럼 젊은 장수들이 나오는 사극을 만들어 보자고 하셨다. 도전의식이 생겼다. 솔직히 이 배역이 나와 어울릴까 하는 의구심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매번 그렇게 따지다 보면 정작 할 게 없을 것 같았다. ‘비열한 거리’를 할 때도 ‘나같이 생긴 깡패가 어딨냐’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럼 나는 뭘 해야 하지? 재벌 2세나 백마탄 왕자님 역할만 해야 하는 건가?’ 그럴 수는 없었다. 내게 씌워진 굴레와 편견에서 나부터 스스로 벗어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복제만 하다가 연기생활이 끝날 수도 있고, 도전만 하다가 연기생활이 끝날 수도 있다면 차라리 후자 쪽을 택하고 싶었다. ‘안시성’도 같은 맥락이다.”

▶실존인물이지만 양만춘에 대한 사료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다. 캐릭터 설정과 접근은 어떻게 이뤄졌나.

“말씀하신 것처럼 사료가 전무했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이 ‘안시성주는 양만춘이라고 들었다’라고 언급한 게 전부다. 그건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관객들도 아는 정보가 없으니 실존인물이라 하더라도 캐릭터를 구축하는 데 있어선 자유로웠다. 하지만 나이와 키, 성품 등 인물에 대한 기준점 없이 출발하려니 좀 애매했다. 결국 시나리오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시나리오에 묘사된 다양하고 치열한 전쟁과 위기상황에서의 결단력, 또 그 사이에 보이는 드라마와 양만춘 개인의 고뇌와 갈등 등을 나름 분석해보니 어느 정도 틀이 잡혔다. 결론은 진지하고 무거운 캐릭터로 만들지 말자였다. 감독님 생각도 같았다. 전쟁신에선 어차피 치열하고 진지해질 수밖에 없으니 그 외의 장면에선 좀 풀어진 모습을 보여주자는 게 콘셉트였다. 이야기 자체가 진지하고 무거운데 이렇게 극을 계속 끌고 나가면 쉽게 지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렇게 나뿐 아니라 (배)성우형, (박)병은형, (오)대환형 그리고 (엄)태구씨와 설현 등 모두 자유롭게 자기 스타일대로 연기하는 것으로 콘셉트를 정했다. 덕분에 내가 심하게 튀어보이지 않고 그 안에서 잘 녹아들었던 것 같다.”


당나라 20만 대군 맞서는 군사 5천명
88일간 안시성 승리로 이끈 양만춘役
총제작비 220억…압도적 전쟁신 감탄
‘반지의 제왕’CG와 비교되는것 뿌듯
‘슬램덩크’ 강백호 같은 이미지 제안
배역 맞을지 몰랐지만 새로움에 도전
너무 힘 빼지도 무겁지도 않게 조절
감독과 소통, 부족한 부분 잘 채워져
정우성·이정재선배 임팩트 조연 멋져
이젠 타이틀롤보다 캐릭터에 더 비중



▶양만춘은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나.

“고대사가 방대하지만 주로 조선왕조에 대한 사료만 남아 있는 게 아이러니했다. 고구려 역사가 700년이니 조선왕조보다 훨씬 더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데 사료는 너무 빈약했다. 때문에 고구려에 대한 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생각을 설로 만드는 게 가능했다. 어떤 특정 인물에 천착해 설을 만들 수도 있고, 전쟁이나 사건 등에 기준점을 놓고 역사를 평가할 수도 있다. 나는 당시 최고 실세인 연개소문에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그가 집권여당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이자 정치와 권력에 대한 야망이 없다는 얘기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대체 무엇을 추구하고 싶었던 걸까. 순전히 내 생각인데 정치적인 야망보다는 안시성민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분명 집권여당에서 벗어났으니 그의 자리를 탐하려는 자도 있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그의 측근인 추수지(배성우), 활보(오대환), 풍(박병은), 파소(엄태구) 등도 호시탐탐 그 자리를 노렸을 수도 있다. 워낙 고구려인들이 호전적인 사람들이지 않나. 그럼에도 잡음 없이 그가 이들을 이끌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아마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그의 카리스마 때문이었을 것이다. 카리스마의 사전적인 의미는 예언이나 기적을 나타낼 수 있는 초능력이나 절대적인 권위, 바로 신의 은총을 뜻한다. 그런 능력을 보았기에 싸움을 잘 하고 힘도 있지만 양만춘에게 무릎을 꿇었을 것이다. 나는 이 과정에서 형의 리더십을 키워드로 일상에서의 내 인간관계를 끌어왔다. 나와 성우형, 대환이형, 태구, 주혁이와의 평소 관계들이 영화에서도 비쳐진다. 그런 설정 덕에 캐릭터 접근이 훨씬 편하고 자연스러워졌다.”

▶여러모로 문제작이 될 영화다. 당신의 필모에서도 의미가 큰 작품으로 남을 것 같은데.

“그건 평가해 주는 분들에게 달린 것 같다. 작품의 규모가 크든 작든 내 필모를 장식할 한 작품일 뿐, ‘내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겠어’라는 식으로 의도를 갖고 접근하진 않았다. 늘 그래왔다. 단지 이번엔 중압감이 많이 느껴지는 작품이라는 정도다. 다행히 반응이 좋아서 산 하나를 무사히 넘은 기분이랄까. 굳이 의미를 따져본다면 연기적으로는 힘을 빼면서 힘을 어디까지 줄 수 있는지를 실험해 본 작품이기도 하다. 너무 힘을 빼면 헐렁거리고 한없이 가벼워지는데 그걸 순간 착각하면 ‘웃겨야 된다’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것들을 이번에 혼자만의 작업처럼 시도해봤는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중간중간 감독님이 그 과정에서 부족한 부분을 잘 채워주셨다. 이 자리를 빌려 감독님과 선후배 동료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전쟁신이 많은 만큼 CG가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블루스크린 작업은 처음일 텐데 어땠나.

“흥미로웠다. 설정만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연기를 하려니 처음에는 어색하고 난감했다. 어느 정도 수위로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20만 당나라 대군을 목전에 둔 상황을 찍을 때는 감이 잘 오지 않아서 감독님에게 몇 번을 확인하면서 촬영했다. 그런데 완성본을 보니 스크린을 꽉 채울 정도로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이 모였다. 주위분들은 ‘반지의 제왕’의 공성전과 많이 비교를 하시는데 그렇게 비교대상이 되는 것만으로도 뿌듯하다. 자부심도 생겼다. 우리 영화가 그만큼 퀄리티가 높다는 얘기이니 그건 영화계에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영화를 보면서 국내 영화가 이룬 기술적인 발전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과거에 비해 배우들의 나이는 물론 역할의 폭도 넓어지고 있다. 그만큼 배우들이 활동하기 좋은 조건들이 마련되고 있다.

“맞다. 예전에는 드라마와 영화 모두 반짝반짝 빛나는 스타들만 주연으로 소비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미스터 션샤인’의 경우만 보더라도 (이)병헌 형이 계속 (주연으로) 나올 수 있는 확장성이 마련돼 있다. 그렇게 배우들이 오래 활동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리고 있고, 연령층도 더 넓어지고 있다. 물론 젊은 친구들도 제 자리를 잘 찾아가고 있다. 요즘은 연기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고 있는 아이돌 출신들이 많아서 배우풀이 좀 풍성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시나리오도 이에 발맞춰 다양하게 기획되고 있다. 여러모로 긍정적이다.”

▶영원한 청춘의 심벌처럼 여겨지는 조인성도 어느새 불혹을 바라보고 있다. 40대의 조인성을 미리 그려본다면.

“모르겠다. 30대의 지금 모습이 20대 때 내가 바라던 모습이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세월이 지나다보니 지금의 조인성으로 남은 건데 그건 기자나 주위분들이 객관적으로 더 확실하게 볼 것 같다. 어찌됐든 오랜 기간 배우로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건 대중이 나를 나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얘기일 수 있다. 나도 마흔이 된 내 모습이 궁금하긴 하다. 그 때는 좀 더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내가 옳고 네가 틀리다는 식이 아니라 나도 그럴 수 있고 너도 그럴 수 있는 동등한 입장에서 위화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편안한 사람으로 다가가고 싶다.”

▶데뷔 20년이 넘었지만 출연작이 많지 않다. 작품선택에 신중한 편인 것 같은데, 예전 인터뷰에서 1년에 한 작품은 꼭 출연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젠 가능할 것 같다. 그간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다른 작품들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그러다보니 꼭 타이틀롤이 아니더라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중에 상관없이 캐릭터가 확실하고 분명하다면 짧은 시간 강한 임팩트를 줄 수 있는 조연이나 단역도 상관없다. 주연이라는 부담감에서 해방될 수 있으니 그 점도 좋고. (정)우성형이나 (이)정재형의 최근작이 그런 경우인데 다들 얼마나 멋있나. 그런 선배들을 보면서 나도 요즘 느끼는 바가 크다.”

글=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제공=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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