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과 책상사이] 고향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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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17 07:50  |  수정 2018-09-17 07:50  |  발행일 2018-09-17 제18면
[밥상과 책상사이] 고향 생각

내 어린 시절 고향 집들은 나지막한 토담이 이웃집과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 옆집에는 나보다 열한두 살쯤 나이가 많은 형이 둘 있었다. 이 집은 원래 6남매였는데 앞의 4명은 어릴 때 저 세상으로 갔다고 들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연년생인 형제는 6개월 간격으로 군에 입대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쉰이 넘었고 문맹이었다. 둘째 형이 군에 입대하기 전날 내 손을 꼭 잡고는 “내가 군에 가고 나서 큰형이나 내가 보낸 편지가 오면 네가 읽어드리고 우리 부모님께서 할 말 있다고 하면 네가 좀 받아 적어 보내다오”라고 부탁했다.

둘째 형이 입대하고 나서 큰형 편지가 왔다. 나는 큰 소리로 두 분께 편지를 읽어드린 후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네 동생은 군에 잘 갔고, 우리는 밥 잘 먹고 몸 성하니 집 걱정은 하지 마라”는 말만 전하면 된다고 하셨다. 나는 편지지 한 장에 그 말만 적기에는 여백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들이 궁금해할 것들을 질문하고는 들은 내용을 자세히 적었다. 여러 차례 편지를 쓰다 보니 글 쓰는 일이 쉬워졌다. 나는 동네에서 일어난 일까지 재미있게 적어 보냈다. 과수원 전지(가지치기), 약치기, 보리타작, 모심기, 논매기, 가을걷이, 사과 수확, 사과 판매와 저장 등에 관한 내용을 순차적으로 적어 보냈다.

대개의 경우 내가 알아서 편지를 쓴 후 읽어드렸고, 그런 다음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묻곤 했다. 어른들은 “네가 우리 집을 우리보다 더 잘 아는구나”라고 놀라워하며 더 보탤 말 없으니 그대로 보내라고 할 때가 많았다. 나는 편지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밥풀로 봉하고는 우표를 붙인 후, 1㎞쯤 걸어가서 우체통에 넣는 일까지 하곤 했다. 내 편지는 고향 소식을 전하는 위문편지이기도 했다. 지금도 내 글쓰기의 출발점은 그때였다고 말한다.

편지 쓰기를 마치면 어른들은 사과, 감, 대추, 곶감 같은 과일을 주셨다. 두 분은 장날에는 꼭 꽈배기를 사다 주셨다. 꽈배기를 싼 종이에 붙어 있는 하얀 설탕을 혀로 먼저 핥아먹고 나서 한 가닥씩 부러뜨려 오래 씹을 때의 그 행복감,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장날마다 나는 늘 꽈배기를 기다리며 동네 어귀를 서성이곤 했다. 두 분이 귀가할 무렵에 내가 없다면 밤에라도 담 너머로 꽈배기를 넘겨주셨다. 어느 해 추석에는 옷도 한 벌 사주셨다. 한밤중의 제삿밥이나 대부분의 작은 물건들은 담 너머로 오고 갔다.

급속한 산업화는 우리를 절대빈곤에서는 벗어나게 했지만 이웃과의 담장은 높아지게 했다. 아파트 철문을 닫으면 벽을 공유하고 있는 옆집도 산 너머 딴 동네보다 더 멀게 느껴진다. 우리 모두는 너무 각박하게 살고 있다. 서로 기댈 수 있는 이웃사촌도 드물다. 동네 사람 모두가 조심하는 대쪽 같은 어른이나 인자하고 마음 후덕한 할머니도 없다. 눈을 감으면 고향집 토담과 꽈배기, 그것을 넘겨주던 옆집 어른의 따뜻한 손길이 생각난다. 한가위가 다가오고 있다.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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