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인물열전’ .16] 김영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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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13 00:00  |  수정 2018-09-13
영남일보 사장 취임 석달만에 주식회사로 출범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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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 취임하였음으로 그간 사장은 결원 중에 있던바 금반 현 본사 편집국장 김영보씨를 사장으로 추천하게 되어 2월1일부로 발령하였사오니 강호제언은 양지하시기 바라나이다.’
 

영남일보 1946년 2월2일자는 신임사장이 선임됐다는 소식을 알리고 있다. 초대사장이었던 김의균이 선임된 지 한달도 되지 않아 경북도 대리지사로 가는 바람에 사장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자리에 편집국장이던 김영보가 선임되었다. 그는 취임 후 영남일보의 운영체제를 바꾸고 편집진용을 강화하는 등 신문사의 골격을 갖추는 데 애를 썼다. 그 중의 하나가 주식회사로의 재편을 무난히 마무리짓는 일이었다.
 

애초 영남일보는 동인제 신문으로 출발했다. 여러 사람이 참여하다보니 다양성과 소통 측면에서는 이점이 컸다. 반면에 책임 경영의 관점에서는 빈틈이 있었고, 이는 자금조달의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그는 영남일보의 동인제 해체와 주식회사로의 출범을 결정한 직후 사장이 되었다. 같은 해 5월20일 창립총회를 열고 주식회사 영남일보로의 출범을 확정지었다.
 

‘문화의 재건을 기획하며 조선건국에 이바지하고자 본사에서는 모든 물심양면의 지성을 초월하여 경북총감을 매년 중책업의 하나로서 계속 간행하게 되었다.’(영남일보 1946년 6월13일자)
 

경제와 문화, 교육 등의 기본적 통계와 해설을 수록한 경북총감의 간행을 알리는 기사다. 그는 사장에 취임한 이후 이처럼 신문사의 사업영역을 확대했다. 이미 신설된 출판국을 통해 영남교육 등의 잡지 발간을 추진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신문사를 통해 벌이는 사회적 공적활동에도 눈을 돌렸다. 영일문화극장이 도내순회공연을 통해 귀환동포 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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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영남일보 주최로 열린 ‘대구시민 대운동회’에서 축사를 하는 김영보 사장 <위쪽). 김영보는 편집국장이 된 후 ‘입사의 말에 대신하여’라는 제목으로 해중의 차륜염각을 인용한 글을 실었다. (영남일보 1945년 11월 13일자)
기 모금운동을 펼친 것이다. 또 웅변대회와 강연회 등 독자를 위한 각종 행사도 활발히 벌였다.
 

‘대로가 평탄하여 직립하여 행보하는 자 있으니 그를 교오고만(건방지고 거만하다)타 할 것인가. 산로가 험준함에 포복하는 자 있으니 그를 가리켜 험로에 견디지 못하여 넘어진 자라 평할 것인가. 세평의 우명함이 왕왕 이 같으니 직립은 탄로(평형하고 넓은 길)에 응한 자세요, 포복은 판로(비탈진 길)에 응한 자세일 따름이다.’
 

영남일보 1945년 11월13일자에 실린 그의 ‘입사(入社)의 말에 대신하여’라는 글이다. 사장이 되기 전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 썼다. 수레를 처음 만든 인물로 알려진 해중의 차륜염각(車輪拈却)을 인용하고 있다. 그는 왜 편집국장으로서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일까.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회고였을까. 그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이미 언론계에 몸담아 적지 않은 글을 써왔다.
 

그는 1900년 부산의 초량에서 났다. 하지만 그가 자란 곳은 개성이었다. 어릴 때 개성에 양자로 갔기 때문이다. 생부와 양부라는 두 사람의 아버지를 가졌던 셈이다. 그리고 일본의 와세다 대학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그는 일찍부터 글쓰기에 소질이 있었고 문학, 희곡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뒀다. 희곡 단행본인 ‘황야’를 펴냈고 ‘황금의 무도’ 같은 작품은 소인극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그는 또 아동문학가인 마해송 등과 함께 문학단체인 녹파회를 조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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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그가 언론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28년 경성일보였다. 매일신보와 매일사진순보의 간부로도 지냈다. 이에 앞서 1927년 2월12일자 매일신보에는 ‘오해받기 쉬운 우담’이란 글을 기고했다. 기자가 되기 전이었다. 우담 두세 꼭지를 더 준비했던 것 같지만 나머지는 실리지 않았다. 또 그의 호 ‘소암(蘇巖)’을 필명으로 ‘망여단상’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1931년 12월에 발행된 잡지(동광 제28호)의 매일신보 대목에는 ‘매일신보 사회부 기자 김영보(내근)’라는 이름이 눈에 띈다. 그는 모범농촌순례기와 총독수행기 등 여러 종류의 기사를 썼다. 일제는 망했고, 광복된 세상에도 그의 모습은 언론인이었다.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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