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웅녀가 고구마를 먹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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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9-11 08:04  |  수정 2018-09-11 08:04  |  발행일 2018-09-11 제25면
[문화산책] 웅녀가 고구마를 먹은 이유
김휘(웹 소설 작가)

신조어는 우리 주변의 생활이나 변화하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요즘 널리 쓰이는 단어 중 하나는 ‘고구마’. 국립국어원 우리말샘에서는 ‘융통성이 없어 답답하게 구는 사람이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답답한 상황을 비유하는 말’이라며 색다르게 정의하고 있다.

실제로 우린 고구마 먹은 듯한 상황을 수없이 접한다. 시험 잘 본 친구와 초라한 내 성적표를 비교할 때, 짝사랑하는 그가 다른 여성을 좋아할 때, 면접관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을 때, 명절날의 공기가 내 가슴을 얼어붙게 할 때 등등. 이 글을 읽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고구마를 먹고 있다. 때로는 그것이 우리를 좌절시키거나 위기로 다가온다. 단군의 출생과 즉위를 다룬 단군신화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이 되길 원하는 곰과 호랑이는 마늘과 쑥만 가지고 100일을 버텨야 하는 시험을 받았다. 그들은 동굴에 갇힌 채 따사로운 햇빛도 볼 수 없었을뿐더러 허기는 커지고 날이 갈수록 야위어갔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 또한 연말연시에 다짐한 약속을 숱하게 깨버리는 걸 감안한다면 크나큰 시련임이 분명하다.

극작가 크리스토퍼 보글러는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에서 신화 속 주인공의 여정을 12단계로 정리했다. 쉽게 말하자면 주인공이 결말에 골인할 때까지 통과할 관문이 처음과 시작만 제외해도 10개나 된다는 뜻이다. 웅녀(熊女)의 여정도 세분화시키면 얼추 맞아떨어진다.

그녀의 인생은 고구마의 연속이었다. 어느 이야기에서건 시험과 위기가 등장한다. 그래야만 주인공이 당위성을 갖추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텁텁하고 답답한 상황이 잇따른다. 웅녀가 가장 목 막힌 순간은 함께 꿈꾸던 호랑이의 포기 선언이 아니었을까?

고구마의 반대말로 ‘사이다’가 있다. 답답한 상황을 속 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사람이나 상황을 비유하는 단어다. 웅녀는 100일 하고도 21일을 더 버텨내서 사람이 되었다. 목적을 달성했다는 것보다 위기에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기뻤으리라. 그렇게 그녀의 이야기는 완성됐다.

우리의 여정도 끝을 보았을 때 완전해진다. 성적표는 행복과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며, 사랑은 본인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면접 질문보다는 안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더 치명적이다. 명절에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언 공기를 녹일 수 있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손에 쥐고 놓지 않는다면 어두운 동굴 속에서 벗어날 일이 온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건 고구마지만, 마침표로 사이다를 들이켜는 게 주인공의 인생인 법이다.

희망은 사이다의 병따개다. 그래서 웅녀는 그렇게도 고구마를 먹었나보다.

김휘(웹 소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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