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권력형 질병과 업무상 질병

  • 뉴미디어부
  • |
  • 입력 2018-09-05   |  발행일 2018-09-05 제31면   |  수정 2018-09-05
[영남시론] 권력형 질병과 업무상 질병
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고 약까지 복용하던 사람이 진단 받은 날로부터 4~5년이 지난 뒤 회고록을 발간했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그 회고록이란 것이 한 개인의 사생활을 담은 기록도 아니고, 한국현대사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역사적 사실을 담은,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이다. 회고록에 허위사실을 적시해 망자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전두환 전 대통령이 회고록을 저술할 당시 이미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밝힌 이상 그 재판은 하나마나한 결과로 귀결될 것 같다. 심신미약자들이 저지른 흉악범죄조차 관대한 처벌을 내릴 정도로 온정이 넘쳐나는 한국의 사법부가 심신미약 상태에 놓여 있는 전직 대통령의 헛소리를 엄하게 처벌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진실일까. 형사고발된 피의자가 법원에 병을 핑계로 불출석사유서를 제출하면서 진단서를 첨부하지 않았을 리는 없고, 전직 대통령이 동네 병의원을 들락거리면서 진단서를 발부받았을 리도 없다. 당연히 어느 대학병원의 고명한 ‘과장님’으로부터 발부받은 진단서일 것이므로 그 병이 재판 불출석 사유가 될 수는 없을지라도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전 재산이 29만원밖에 없다고 한 것도 알츠하이머병의 전조 증상이었을 수도 있으니까.

우리 사회에는 상식에도 어긋나고 의학적 인과관계조차 불분명하지만 권력자들만 앓는 권력형 질병이 있다. 그 진단 과정에는 재력이나 권력의 위력이 작용한 ‘진단거래’가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는 하지만 사법부의 ‘재판거래’와 마찬가지로 증거를 포착하기가 어렵다.

온 세계를 제 집 안방 드나들 듯하던 재벌총수가 탈세나 배임혐의로 기소만 되면 이 세상에서 제일 파리하고 측은한 표정으로 휠체어에 앉을 수 있게 만드는 힘은 바로 법원에 제출된 의사의 진단서 한 장이다. 청부살인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중죄인이 거듭된 형집행정지라는 특혜를 누리며 병원 특실에서 초호화판 수감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의사의 진단서 덕택이었다. 그 진단서를 발급한 의대교수는 재수없게도 ‘진단거래’가 들통이 나서 쇠고랑을 차게 되었지만.

‘전치 8주의 마비성 상사시’. 2009년 국회 로비에서 시민단체 회원들과 실랑이를 하는 과정에서 신체 접촉이 있은 뒤 병원에 입원한 전여옥 전 국회의원에게 내려진 진단이다. 대학병원의 과장님이 근엄한 표정으로 기자회견까지 했지만, 마비성 상사시라는 진단이 내려진 근거는 물론 왜 단순한 신체 접촉에다 부상도 경미한 수준인데 무려 8주의 치료 기간이 필요한지에 대한 소명은 전혀 없었다. 대신 당시로도 나이 70이 넘은 시민단체 회원들만 폭행의 직접 증거도 없이 파렴치한 집단폭력배가 돼 재판에 넘겨졌다. 국립 서울대병원의 신경외과 과장님은 물대포에 맞아 치사상태에 이른 백남기 농민을 막무가내 수술해 생명만을 연장시켜 놓고 뒤늦게 사망에 이르자 외상이 아닌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사망진단서를 발급했다. 국회 청문회에 불려 나온 그는 의과대학생들조차 갸우뚱하는 그 진단을 학자의 소신인 양 당당하게 말했다. 권력의 위력에 곱송그리는 국립 의대교수의 애처로운 헛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 시민들의 마음은 착잡했으리라.

몸 하나로 먹고사는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자신의 병이 업무와 연관된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받는 과정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 어렵다. 백혈병을 앓던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문제가 해결되기까지는 무려 11년의 세월이 걸렸다. 시민단체와 노동단체는 물론 언론의 관심까지 집중된 사업장의 형편이 이런 수준이면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들의 건강권은 어떤 수준일지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과 재력을 움켜쥔 이 나라의 상층부 1%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게 하는 권력형 질병이 적힌 진단서를 너무나도 쉽게 손에 거머쥔다. 그것도 서민들은 진료조차 받기 힘들다는 유명 대학병원 과장님의 도장이 찍힌.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