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석의 電影雜感 (전영잡감) 2.0] 김지운 감독 ‘인랑’의 실패

  • 김수영
  • |
  • 입력 2018-08-31   |  발행일 2018-08-31 제43면   |  수정 2018-09-21
웰메이드 ‘한국 SF’ 탄생을 위한 기다림
20180831
흥행 참패로 이어진 김지운 감독의 ‘인랑’.
20180831
20180831

김지운 감독의 ‘인랑’이 흥행 참패할 거라고 예상한 이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수많은 마니아 팬을 갖고 있던 오시이 마모루의 원작 애니메이션에, 스타일리시한 액션 연출에 능한 ‘장르 탐식자’ 김지운 감독 연출에, 배우 강동원 정우성 김무열 최민호 같은 미남 배우들이 대거 나온다는데. 그러나 개봉하자마자 주요 포털 사이트 영화 페이지에 평점 테러가 이어졌고 언론 매체의 평가도 대부분 우호적이지 않았다. 출연 배우들에 대한 거부감이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했지만, 충분히 극에 녹이지 못한 멜로 요소와 연이어 터지는 사건을 제때 설명하지 못해 살리지 못한 서스펜스가 문제였다. 결국 제작비 190억원이 투입돼 손익분기점이 600만명이었던 ‘인랑’은 고작 관객 89만명을 동원하고 극장에서 퇴장했다. ‘인랑’의 실패는 김 감독 개인의 실패나 제작사인 루이스 픽처스의 실패만이 아니라 한국SF영화의 실패라는 차원에서 더욱 아쉽고 가슴 아픈 일이다.

SF영화 팬들에게 2002년은 기억할 만한 한 해였을 것이다. 저마다 SF를 전면에 내세운 블록버스터 대작들이 연이어 개봉한 해였기 때문이다. 나 역시 당시 SF영화가 과연 한국영화 블록버스터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 점쳐보던 기억이 새롭다.

이시명 감독의 ‘2009 로스트 메모리즈’(2001)는 2002년 2월 개봉했다. 배우 장동건과 일본배우 나카무라 도오루를 기용해 만든 영화는 제작비가 80억원이 들었다. 대체역사를 기반으로 한 SF 영화로 헝클어진 역사, 아버지에 대한 오해, 시간이 갈라놓은 사랑, 적이 되는 친구같은 흥미로운 설정이 많았으나 그것을 한데 모아줄 드라마가 약했다. 영화 ‘친구’로 재조명되던 장동건의 차기작이었음에도 겨우 85만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강우석 감독의 조감독을 지낸 이 감독은 이 영화 이후 오랜 휴지기를 거쳐 ‘흡혈형사 나도열’ 연출 기회를 얻어 가까스로 재기하는 듯 보였으나 차기작 소식이 들리질 않고 있다.


연이어 터지는 사건설명 부족, 못살린 서스펜스
손익 600만명 턱없이 못미친 89만 동원 ‘인랑’
김지운 감독의 실패, 갈길 먼 한국 SF 아쉬움

장동건 발탁 화제 2001년 ‘2009 로스트메모리즈’
2002 ‘성냥팔이 소녀 재림’ 2003‘내츄럴 시티’
새롭고 독창적인 미래세계 불구 관객들은 외면
장준환 2003‘지구를 지켜라’평단 호평에도 참패

심형래 ‘디워’842만명 들어도 제작비 회수 실패
2013‘설국열차’평단·관객 만족감…가능성 제시


정윤수 감독의 ‘예스터데이’(2002)는 2002년 6월 개봉했다. 2020년 통일된 한반도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납치극과 연쇄살인사건의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SF 스릴러를 표방했던 영화는 제작비 80억원을 들여 세련된 영상과 수준급의 특수효과를 내세웠지만 연출의 리듬과 이야기 전달 능력 부족으로, 따로 영화를 한 편씩 찍었어도 최소 몇 십만에서 몇 백만명은 동원할 수 있는 배우 김승우·김윤진·최민수·김선아를 데리고도 폭망했다. 여균동 감독의 데뷔작 ‘세상 밖으로’에서 조연출을 맡았던 정 감독은 이후 오랫동안 차기작 연출 기회를 잡지 못하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아내가 결혼했다’ ‘두 여자’ 같은 청불 로맨스 영화로 급선회한다.

장선우 감독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2002)은 2002년 9월 개봉했다. 신비주의 콘셉트의 TTL 소녀로 유명한 배우 임은경의 영화 데뷔작이었고, 당시 영화 ‘세친구’와 ‘스물넷’으로 주목받던 배우 김현성이 공동 주연이었다. 수많은 액션영화의 장면을 베끼고 남용하고 조롱하는 장 감독의 키치 미학으로 점철된 영화는 재난급인 13만8천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극장에서 내려왔다. 이 영화 이후 임은경과 김현성은 기억할 만한 필모그래피를 만들지 못하고 장 감독 역시 깊은 침묵에 들어간다.

이 세 편이 나란히 참패를 겪고 난 이듬해 개봉한 민병천 감독의 ‘내츄럴 시티’(2003)는 전작 ‘유령’의 호평에 힘입어 76억원을 들여 제작한 대작이었다. 배우 유지태와 이재은의 호연과 민 감독의 매끈한 연출에도 불구하고 22만명의 관객만 극장에서 만났다. ‘블레이드 러너’나 ‘공각 기동대’의 흔적이 일부 보이긴 했지만 한국영화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미래세계의 전형은 충분히 독창적이고 탁월했다. 그러나 민 감독은 아직까지 차기작을 선보이지 못하고 있다.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2003)는 SF와 스릴러를 표방한 영화로 “2000년대 가장 인상적인 한국영화 감독 데뷔작”(이동진)이란 평을 받았지만 흥행엔 참패했다. 그러나 배우 신하균과 함께 주연으로 나온 백윤식은 이 영화를 시작으로 오랫동안 활동해온 TV 드라마에서 영화로 활동 반경을 옮겨 인상적인 작품을 잇따라 내놓는다. 그러나 장 감독은 오랜 휴지기를 가져야 했고, ‘화이’로 10년 만에 복귀한 이후 최근 ‘1987’로 데뷔 이래 첫 흥행작을 만들었지만 장 감독의 기상천외한 데뷔작을 기억하는 이들이 원한 차기작은 아니었다. 반면 장준환 감독과 한국영화 아카데미 동기이기도 한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과 ‘설국열차’(2013)는 평단과 관객을 함께 만족시킨, 한국영화계에선 드문 SF영화였다. ‘살인의 추억’부터 함께 작업해온 배우 송강호와 작업한 두 영화는 최근 한 해외매체에서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SF영화’ 순위에 모두 이름을 올리는 쾌거를 누렸다.

심형래 감독의 ‘디워’(2007)는 LA 도심 한복판에 이무기 부라퀴 무리가 습격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SF 블록버스터로 할리우드 배우 제이슨 베어, 아만다 브룩스, 로버트 포스터, 크리스 멀키가 출연했다. 순 제작비 300억원, 총 제작비 700억원이 든 것으로 알려져 개봉 당시 842만명의 관객을 기록했지만 제작비를 회수하는 데는 실패해 심 감독은 자신이 설립한 영구아트의 폐업 및 직원의 임금·퇴직금 체불 등으로 피소된 바 있다. 최근 심 감독은 여러 곳에서 투자를 받아 ‘디워2’ 제작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당분간 ‘인랑’의 실패로 한국영화계에서 SF영화가 제작되는 일은 요원할 것이다. 최근 김용화 감독이 이끄는 텍스터 스튜디오가 그간 한국영화에서 꾸준히 제기되던 VFX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하고 있어 여느 때보다 SF영화 만들기가 나쁘지 않은 환경이라 더 아쉽다. 문제는 SF영화 전문 감독과 제작사 부재다. 언제쯤 평단과 관객, 업계가 모두 만족할 웰메이드 한국SF영화를 볼 수 있을는지, 기다림의 시간이 길지 않았으면 한다.

독립영화감독·물레책방 대표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