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칼럼] 한국이 반납한 아시안게임

  •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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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29   |  발행일 2018-08-29 제31면   |  수정 2018-08-29
[박재일 칼럼] 한국이 반납한 아시안게임

까까머리 중학생은 흑백TV에 가득 넘친 경기장을 보면 탄성을 질렀다. 그건 동대문운동장, 대구시민운동장에 비할 바 아니었다. 테헤란 스타디움은 로마 콜로세움을 방불케 했다. 그것뿐이랴. 긴 레인에 바닷물을 가득 넣은 듯한 수영장은 푸른 빛깔 그대로를 상상케 했다. ‘우린 언제 저런 경기장을 가질 수 있을까.’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은 아직도 생생하다. 중학교 1학년인가. 그때는 이 땅의 남학생이 다 그렇지만 스포츠는 일상이고 또 로망이었다. 열광했다. 이후로 숱한 아시안게임이 있었지만, 테헤란이 가장 뇌리에 박혀 있다. 어쩌면 중동붐을 타고 이란의 수도명(名)을 딴 서울 강남의 테헤란로(路) 탓도 있을 것이다.

스포츠는 국가가 강성할 때 혹은 최소한 국가가 윤택할 때 확장된다. 종종 그것은 정치적으로 ‘스포츠 국가주의화’하면 더욱 비대해진다. 팔레비 왕조의 이란은 아마 그때가 전성기였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도 북한처럼 종이호랑이가 아닌 실력으로 미국에 맞서는 나라이기는 하지만.

‘우린 언제 저런 경기장을’ 하던 꿈은 그렇게 큰 세월이 흐르지 않아 실현된다. 꼭 12년 뒤 서울 아시안게임이 있었고, 이어 88서울올림픽으로 우린 오히려 스포츠 국가가 돼버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부산(2002년)에 이어 인천(2014년)까지 아시안게임을 밥 먹듯 치렀다. 그사이 대구도 세계 3대 스포츠 제전이란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테헤란 경기장을 뛰어넘는 웅장한 대구스타디움을 통해 세계로 과시했다.

일련의 현재는 사실 원래부터 이뤄졌던 것은 아니다. 테헤란의 4년전, 1970년 아시안게임은 서울에서 개최키로 돼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다. 덜컹 유치를 했지만 국가 재정이 문제였다. 국민소득 수백달러에 불과하던 1960년대다. 경제개발에 들어갈 돈이 급한데 스포츠 행사에 달러를 쓰기에는 여유가 없었다. 결국 벌금 20만달러까지 물어가며 개최권을 반납했다. 속으로 다들 울었을 것이다. 1968년 북한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으로 인한 안보 문제도 반납의 배경이었다. 태국 방콕이 대신 개최했다. 1970년 그때 우린 그나마 혜성처럼 등장한 아시아의 물개 조오련 선수에 위안을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이 시각 열리고 있는 제18회 아시안게임도 애초 개최지는 인도네시아(자카르타-팔렘방)가 아니었다. 2012년 개최도시 결정에서 베트남의 하노이가 낙점됐다. 두바이와 투표까지 간 끝에 베트남은 개최권을 따냈지만, 수억달러가 넘는 비용을 우려한 끝에 포기해 버렸다.

인도네시아 역시 빈부격차가 심하고, 오염된 하천을 외국 선수들이 보지 못하게 천막 가리개를 설치했다고는 하지만, 베트남보다는 국력에서 한 수 위다. 경제 규모는 5배다. 여기에 스포츠 국가주의, 스포츠 정치가 개입했다. 조코 위도로 대통령은 내년에 선거를 앞두고 있다. 올림픽 바로 한 해 전인 2019년에 아시안게임을 치르자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의 결정을 반대하고, 선거 전인 올해 개최를 고집한 이유다.

지금 와서 안 사실이지만 제7회 테헤란 아시안게임에는 1회 대회부터 당연히 포함됐던 마라톤 종목이 제외됐다. 마라톤이 그리스 아테네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에서 유래한 탓에 ‘페르시아의 후예 이란’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2천500년 전 민족적 앙금이 현대 스포츠에서 고스란히 살아났다.

우린 많이 변했다. 인도네시아에서 들려오는 스포츠 중계는 과거처럼 꽥꽥거리지 않는다. 일본만은 이겨야 한다는 지상명령도 없고, 북한은 반드시 넘어야 한다는 외침도 줄었다. 국가를 과도하게 앞세우지도 않는다. 스포츠 국가주의가 대한민국에서는 퇴조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인지 아시안게임 2위 메달 목표도 흐지부지 흔들린다. 성적에는 유감이지만, 국가는 그렇게 성숙한다.

그래도 나는 한때 우리가 어렵고 달러가 없어 아시안게임을 반납한 적이 있던 나라였다는 사실을 오늘의 청년들이 좀 알았으면 한다. 그런 역사를 공유할 때 국가의 성숙도가 층층이 쌓여가는 것이라 믿고 있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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