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의 고장 청송 .13] 진보의진 창의장 방산 허훈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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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29   |  발행일 2018-08-29 제13면   |  수정 2018-09-12
5세에 사략·통감 외울 만큼 영특…을미사변 땐 토지 팔아 군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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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훈은 생전에 남덕정을 지어 동생 허위를 그리워하고 집안의 장래를 걱정했다고 한다. 남덕정은 지금 청송군 진보면 괴정2리 마을 끝에 종가 재실로 자리하고 있다. 남덕정 문을 열고 들어서면 광제문(光霽門) 현판이 걸린 재실이 나온다.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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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4월 진보의진이 결성된 진보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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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가 재실 맞은편에 서 있는 ‘방산허선생묘도비’.

평생을 처사로 살고자 하였다. 평생을 공부하고 가르치며 살고자 했다. 그것이 미래를 밝히는 일이라 믿었다. 노력하였고 갈등했다. 결국 무장하여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고, 집안과 나라의 불행을 막지 못했다. 근대 전환기 지식인의 시대적 한계였다. 구한말의 학자이자 의병장 방산(舫山) 허훈(許薰)이다. 
 

성재 허전·계당 유주목 문하에서 수학
근기학파와 영남학파 양쪽 폭넓게 계승
1867년 방암산 아래 터 옮겨 학문 매진
이명숙·이치첨 등과‘유주방산록’남겨
1896년 진보의진 결성 의병장으로 활약


#1. 과거보다는 학문에 몰두

허훈은 헌종 2년인 1836년 선산 임은리(林隱里)에서 태어났다. 자는 순가(舜歌) 호는 방산이다. 증조부는 불고헌(不孤軒) 허돈(許暾)으로 미수(眉) 허목(許穆)의 문하를 출입했던 인물이고, 조부는 태초당(太初堂) 허임(許恁)으로 채제공의 문인들과 교유한 지역의 이름난 선비였다. 아버지는 청추헌(聽秋軒) 허조(許祚),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 이휘수(李彙壽)의 딸이었다. 장자로 태어난 허훈은 후사가 없던 백부 허정(許柾)의 양자가 되어 백모 여강이씨(驪江李氏)의 손에 자랐다.

어린 허훈은 조부인 태초당에게 글을 배웠는데, 태초당은 손자에게 ‘도덕과 문장으로 큰 인물이 되라’는 뜻으로 도문(道文)이라는 아명(兒名)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허훈은 ‘5세에 공부를 시작해 사략(史略)과 통감(通鑑)을 가르쳤더니 몇 번 읽고는 곧 암송하였다’고 전해질 만큼 영특했다. 또 매화를 두고 시를 짓게 했더니 ‘네가 뭇 꽃의 으뜸이다(爾爲百花宗)’라고 답해 선비들이 ‘훗날 유림의 종장(宗匠)이 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 ‘10세에 시서(詩書)에 통하였고 제자서(諸子書)도 그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허훈은 할아버지 태초당을 통해 한학의 기초와 옛 현인들의 글, 그리고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를 주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51년 16세의 허훈은 연안이씨(延安李氏) 해연(海蓮) 이봉기(李鳳基)의 딸과 혼인했다. 이봉기는 근곡(芹谷) 이관징(李觀徵)의 6세손으로 당시 서울문단에 글과 글씨로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다. 혼인 후 허훈은 장인에게서 학문을 배우며 다양한 시문을 공부하게 되는데 ‘세속선비의 과거시험 글 외에 고문(古文)이 있음을 알고 이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던 것은 실로 선생께서 인도해주신 결과’라 했다.

허훈은 22세인 1857년에 향시(鄕試)에 합격했다. 그러나 복시(覆試)에 실패하면서 과거를 포기하고 이후 경전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장인이 계속해서 과거에 도전할 것을 권하지만 허훈은 응하지 않았다. 그는 ‘어리석고 어눌해서 시의(時宜)에 부합하지 못하니 차라리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고 했지만 실은 청탁과 뇌물이 횡행했던 당시 과거시험장의 부패와 비리가 원인이기도 했다. 특히 허훈은 과거에 응시하기 몇 해 전, 숙부인 해초(海樵) 허희(許禧)가 그러한 비리로 인해 과거를 포기한 것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이후 허훈은 성재(性齋) 허전(許傳)과 계당(溪堂) 유주목(柳疇睦)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실용주의의 근기학파(近畿學派)와 학문의 본원을 중시하는 영남학파 양쪽을 폭넓게 계승하게 된다. 1867년에는 이웃 고을인 개령(開寧, 현재의 김천) 지천동(芝川洞) 방암산(舫巖山) 선영 아래로 터를 옮기고 정사를 지어 학문에 매진했다. 스스로 방산(舫山)이라 이름 짓고 새로운 학자적 삶을 시작한 때였다.

#2. 청송 진보로 터를 옮기다

그즈음 나라는 매우 복잡하고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서원철폐, 병인양요, 신미양요,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 이후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과의 통상수호조약,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대내외적인 정세가 온나라를 들썩이게 했다. 허훈은 이러한 ‘구한말의 정세’를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고 고뇌에 빠졌다. 하지만 직접 나서려 하지는 않았다. 평생 공부만 했던 그는 난국에 정면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실추된 도학의 정도(正道)를 밝히고 학문과 교육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한 길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혼란한 시국은 그의 학자적 삶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허훈은 결국 지천동을 떠나 청송 진보면 흥구리(興丘里) 비봉산 아래로 이주했다. 제자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이 허훈에게 편지를 보내 지금의 난국에 관중과 제갈량이 되어 주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그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1895년 8월에는 이명숙(李明叔) 이치첨(李穉瞻) 등 20여명과 청송 주왕산에 올라 ‘유주방산록(遊周房山錄)’을 남겼다. 그로부터 며칠 뒤,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말았다. 전국에서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허훈은 토지를 팔아 두 아우인 성산(性山) 허겸(許)과 왕산(旺山) 허위(許蔿)의 군자금으로 내어주었다. 그는 동생들에게 ‘진심갈력하여 위난할 때 보국하라’고 독려했다고 한다.

직접 나서지 않고 처사적 삶을 고수했던 그도 결국 1896년 4월 진보향교에서 ‘진보의진’을 결성한다. 당시 그는 예순이 넘은 나이였다. 청송지역 의병의 활약상을 담은 ‘적원일기’에 따르면 ‘진보의진은 그 규율이 당당하고 절제가 삼엄해서 영(令)이 나가면 새는 폐단이 없고 사람을 쓰는데 뒤섞임이 없어 인근의 모든 의병진이 능히 미칠 수 없었다’고 한다. 또 의병대장 허훈에 대해서는 ‘문장과 학식이 있으며 지모와 재략이 곽종석(郭鍾錫)과 더불어 우열을 가릴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보의진은 창의 후 안동, 청송, 영양 등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펼치며 의병역사에 중심에 섰다. 하지만 고종의 해산령에 따라 진보의진 역시 해산해야 했다.

#3. 종가 재실 ‘남덕정’

허훈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은 진보의 광덕리(廣德里)다. 그는 그곳에서 남덕정(覽德亭)을 짓고 살았는데, ‘간운헌(看雲軒)’이란 현판을 걸고 멀리서 활동하던 동생 허위를 그리워하고 집안의 장래를 걱정했다고 한다. 1904년에는 참봉에 제수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1907년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의 원장 직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고 진보 괴정리 산에 묻혔다. 72세였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다양한 체험과 학문적 탐색 결과를 수십 권에 달하는 방대한 문집 ‘방산집’에 남겼다.

허훈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집안은 나라의 운명과 같이했다. 그에게는 신(藎), 겸(), 위(蔿) 3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허신은 요절했고, 의병장이던 동생 허위는 1908년 체포와 동시에 처형당했다. 허겸은 허위의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하여 평생 독립운동을 하다 이국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일족 대부분이 국내외로 흩어진 가운데 남덕정만이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후 병화로 파괴되고 말았다.

지금 남덕정은 청송군 진보면 괴정2리 마을 끝에 종가 재실로 자리하고 있다. 증손 허흡(許洽)이 허훈의 묘소 아래에 새로이 짓고 현판을 걸었다. 허흡은 민선 4대 대구시장을 지낸 인물이기도 하다. 재실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로 광제문(光霽門) 현판이 걸려 있다. 비도 눈도 그치고 이제는 빛난다는 뜻일까. 대문 맞은편에는 ‘방산허선생묘도비(舫山許先生墓道碑)’라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현재 남덕정과 묘소 사이에는 당진~영덕고속도로의 높은 옹벽이 서 있다. 도로 아래 두 개의 수로 사이에 있는 촘촘한 돌계단이 원래 묘도비가 있던 자리이고 가장 오른쪽 통로가 묘소로 가는 길이다.

산길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묘소는 허흡의 묘다. 그다음은 허훈의 손자 허종(許鍾)의 묘, 다음은 허훈의 장자 허숙(許肅)의 묘, 그 뒤로 허훈의 묘가 있다. 그리고 그 위로 생부인 허조와 양부인 허정의 묘가 이어진다. 묘들은 허흡이 이곳으로 모두 이전해 왔다고 한다.

허훈은 임종 직전 ‘명정(銘旌)에 관직명을 쓰지 말고 방산처사(舫山處士)라고만 쓰라’고 유언했다. 끝까지 처사로 살았던 학자의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였던 것이다. 지금 허훈의 묘소 앞에 1995년 9월에 새로이 놓은 검은 상석에는 ‘참봉 방산선생’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기억할 수 있는 것, 전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남기고 싶었던 후손의 마음일 것이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 참고문헌=청송의병사이버박물관 자료. 동양고전연구 제54집. 유교문화.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김희곤·권대웅 외, 청송의 독립운동사, 2004. 황위주, 방산 허훈의 삶과 학문성향,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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