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희의 그림 에세이] 신사임당 ‘원추리와 개구리’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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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24   |  발행일 2018-08-24 제39면   |  수정 2018-09-21
천을산 정상에서 본 원추리 꽃과 신사임당…고요히 소란스러운 여름의 단란한 한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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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원추리와 개구리’, 종이에 채색, 34X28.3㎝, 1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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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녹색 사이로 연둣빛 등이 주렁주렁 달렸다. 매일 산을 오르지만 갑작스러운 광경 앞에 걸음을 멈췄다. 올해 산을 단장하면서 비탈진 부분에 나리꽃을 심은 모양이다. 남몰래 자라다가 ‘짠’하고 자태를 드러냈다. 열기가 식지 않은 여름날 아침, 천을산 정상의 나리꽃 군락이 지친 심신을 달래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고깔처럼 부풀어 오른 꽃망울이 비실비실했다. 자세히 보니 줄기에 진딧물이 하얗게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미 꽃대마저 장악됐다. 진딧물에 포위된 꽃망울이 정상적으로 필 수 있을까, 날마다 걱정이 앞섰다.

나리꽃은 주황색에 검은색 땡땡이가 점점이 박혀 있어서 강렬한 인상을 준다. 긴 수술을 내밀고 활짝 웃는 모습이 순박한 아가씨 같다. 천을산 정상에 무리지어 핀 나리꽃이 또 하나의 장관이어서 가슴이 설렌다. 언뜻 보기에 나리꽃과 비슷하게 보이는 원추리 꽃도 있다. 자세히 보아야 구분이 간다. 원추리 꽃은 뜰 후원이나 야산에서 잘 자란다. 자연스럽게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의 ‘원추리와 개구리’가 떠오른다. 여름을 상징하는 원추리와 개구리가 콤비를 이루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사임당 신씨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84)의 어머니로 더 유명하다. 남성 위주의 조선시대에 여성이 화가로 산다는 것은 마치 진딧물에 에워싸인 나리꽃 신세를 연상케 한다. 다행히도 좋은 환경이 그녀에게 빛이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학문을 익히고 서화를 배웠다. 산수화는 ‘몽유도원도’의 화가 안견(安堅)의 그림을 사숙했다고 한다. 결혼 후, 일곱 명의 자식을 둔 어머니로서 대가족을 꾸려야 하는 힘겨운 삶이었다. 게다가 여성이 예술적 재능을 발휘한다는 것이 금기시되었던 사회에서 결혼한 여자가 화가로 산다는 것은 뿌연 장막의 연속이었다.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고민과 번뇌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경을 이겨낸 그녀는 조선시대 화가의 반열에 당당히 오른다.

사임당의 그림은 후세의 문인들에 의해 평가를 받는다. 이이의 스승이기도 했던 어숙권(魚叔權)은 “신사임당은 포도그림과 산수화가 뛰어나며, 특히 산수화는 안견에 버금간다”라고 평했다. 1548년 문신 소세양(蘇世讓, 1486~1562)은 사임당의 산수화를 본 감상문을 제화시(題畵詩)로 남기기도 했다.

“시냇물 굽이굽이 산은 첩첩 둘려 있고/ 바위 곁에 늙은 나무 감돌아 길이 났네./ 숲에는 아지랑이 자욱이 끼었는데/ 돛대는 구름 밖에 뵐락말락 하는구나.// 해질녘에 도인 한 사람 나무다리 지나가고/ 막 속에선 늙은 중이 한가로이 바둑 두네.// 꽃다운 그 마음은 신과 함께 열렸나니/ 묘한 생각 맑은 자취 따라잡기 어려워라.” 안타깝게도 이 산수화는 전하지 않지만 사임당의 재능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사임당의 작품은 별로 없지만 8폭 병풍인 ‘초충도’는 그녀의 대표작품이다. 여성 특유의 세밀한 눈길로 서정성을 담아서 그림이 담박하고 해맑다. 이 ‘초충도’를 본 송상기(宋相琦, 1657~1723)는 “꽃과 채소들은 종류마다 자세하게 그려졌고 벌레와 나비의 동작은 입신(入神)의 경지에 들어서 생동감이 넘친다”고 했다.

사임당의 특장이 살아 있기는 ‘원추리와 개구리’도 마찬가지다. 여름 어느 날, 야생의 동식물이 파티에 초청을 받아 모두 모였다. 화폭 중앙에 주인공인 원추리를 둘러싸고 개구리는 왼쪽 바깥을 바라보며 멋진 포즈를 취했다. 꽃잎 아래쪽에서는 달팽이가 개구리의 뒤를 따른다. 매미도 개구리에게 뒤질세라 중앙의 꽃줄기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했다. 왼쪽 하늘에는 붉은 나비가 벌 쪽으로 하강한다. 흰 나비는 오른쪽 하늘에서 꽃을 보고 있다. 매미는 맹렬히 노래하고, 나비 한 쌍이 꽃으로 향한다. 여름의 단란한 한때가 고요히 소란스럽다.

사임당의 ‘초충도’는 앙증맞으면서 정겹다. 세심한 필세로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몰골법’으로 처리한 꽃잎과 이파리가 실감난다. 일렬로 묘사한 흙이 땅과 하늘의 경계를 이룬다. 자칫 작품이 심심할 수도 있겠지만 풀과 꽃, 벌레, 곤충이 저마다의 역할에 충실한 탓에 화면이 실하다. 서정적이면서 단단했을 사임당의 마음을 보는 듯하다.

조선시대에 여성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갈등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이이를 낳은 훌륭한 어머니라는 시선 뒤에, 그녀의 화가 인생은 가려졌다. 남성적 장르로 인식된 산수화보다는 여성의 그림으로 폄훼된 ‘초충도’를, 그녀는 당당하게 조선시대 회화의 한 장르로 올려놓았다. 초충도는 ‘조선 회화의 블루오션’이었다.

연신 기록을 경신하는 더위와 싸우다가 며칠 만에 산에 올랐다. 눈앞이 환했다. 비실거리던 꽃들이 용케 피어서 주황색 등을 주렁주렁 밝혔다. 얼마나 아름답고 고마운지 한참을 서서 보았다. ‘참, 수고했어, 고마워.’ 그러고 보니 사임당이 원추리였다. 숱한 역경에도 그녀는 마침내 화가로 활짝 피었다. 원추리는 그녀의 자화상이었다.

천을산 정상에는 신사임당 꽃이 산다.화가 2572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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