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진의 사필귀정] 병목에 걸린 민원

  • 윤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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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15   |  발행일 2018-08-15 제22면   |  수정 2018-09-21
20180815
<대구대 경찰행정학과 교수>

경찰이 되어 오랜만에 찾아온 제자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근무 잘 하고 있는지 물어보니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어 너무 보람차단다. 오랫동안 품어온 꿈을 이루어 성실하게 근무하는 모습을 보니 무척 대견하다. 힘든 일은 없는지 물어보니 야간에 술 취한 시민과 씨름하는 일이 여간 곤혹스럽지 않단다. 수년 전부터 경찰이 주취 폭력에 대해 엄정하게 대응하고 있음에도 일선에서는 사정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모양이다.

술 먹고 행패 부리는 사람 가운데 유독 높은 사람을 찾는 일도 적지 않다니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사람은 유독 높은 사람과 직접 상대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술 취해 난동 부리는 사람은 공권력으로 제압해야 하는 대상임에도 막상 난동을 부리는 당사자가 서장 나오라 하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일은 경찰서나 파출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시청이나 구청에 가보면 시장 또는 구청장과 면담하겠다고 소리치는 민원인이 드물지 않다. 일선에 근무하는 경찰이나 민원 창구에 있는 공무원이 충분히 응대하고 처리할 수 있는 일인데도 말이다.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청와대 국민신문고에는 국민청원이 넘쳐나고 있다. 한편으로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에 대한 높은 기대가 있는 그대로 표현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파적 이익에 치우쳐 정치가 실종되고 정치권이 국민의 요구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사회적 갈등이 청와대로 향하면서 민원의 병목이 심해지는 현상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대부분의 민원은 관련 부처와 일선 행정 기관에서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한데도 매번 청와대가 나서 답해주기를 바라는 일이 정상적인 것만은 아니다.

유독 높은 사람을 찾는 우리 국민의 태도에서 일상 속에 깊게 뿌리 내린 권위주의의 한 단면을 발견한다. 우리 사회가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장기간 억압되어온 시민의 목소리가 민주화 시대를 맞이하여 표출되는 일이야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힘센 사람만 찾는 것은 여러모로 생각해볼 일이다. 모든 민원이 향하는 곳이 청와대라면 대통령에게 모든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제왕적 능력을 기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권위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커지고 있음에도 만사형통하는 대통령을 기대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며 여전히 전근대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높은 상황에서조차 청와대로 민원이 집중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논란을 삼을 수 있거니와 만약 지지율이 떨어지는 날이면 여기저기에서 가시화되는 사회적 갈등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 생각할수록 황망하다. 청와대가 크고 작은 갈등을 모두 수용하고 해결하는 역할을 언제까지나 도맡을 수는 없는 일이다. 아무쪼록 사안의 해결을 본질로 하는 합리적인 민원 수용 제도와 처리 절차가 확립되어 일반 국민이 마냥 높은 곳만 찾지 않아도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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