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단양 적성비·동치악산 부곡계곡

  • 김수영
  • |
  • 입력 2018-08-10   |  발행일 2018-08-10 제37면   |  수정 2018-09-21
땅·하늘·바람·역사의 길 위에 서서 숨이 막힐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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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흥왕때 쌓은 단양 적성산성내 성벽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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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치악산 부곡지구에 있는 곧은재 가는 트레킹 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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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흥왕때 세워진 단양적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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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 동치악산 부곡지구의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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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성산성의 외곽 모습.

성하의 빛살이 떨어지는 곳은 모두 청포도색이다. 산자락에서 내려다보는 남한강 물줄기가 청포도 넝쿨로 보인다. 작고 큰 산들이 군(群)을 이루고 청록의 색감으로 하늘과 맞물려 있다. 산야에 보이는 것은 청록의 사이클이 순환하는 파노라마다. 저 강은 아름다운 뒤태를 드러낸 채 유유히 흘러 어디로 가는 것일까. 정하게 다듬어진 길을 걸어 적성산성에 도착한다.

적성산성은 신라가 한강으로 나아가는 교두보였다. 이 성은 신라 진흥왕 때인 545~551년경에 쌓았다. 말하자면 1500년 전 신라인의 숨결과 땀 힘으로 축조한, 그들의 꿈을 키운 곳이고 미래를 열어간 곳이다. 산성 둘레는 900m였으나 거반 무너지고 겹으로 쌓은 북동쪽의 안쪽 벽 등 일부분만 남아 있다. 동으로 성벽 윗길을 따라 걷는다. 어디서 신라인이 불쑥 나타날 것만 같은 허물어진 옛적의 성벽이 타임머신처럼 시간을 넘어선다. 점판암으로 차곡차곡 쌓은 성벽은 높이 3~10m에 이르고 폭은 3~5m에 달한다. 안쪽으로 군사와 병마가 다닐 수 있도록 평평하게 다졌다. 성벽 윗길로 올라서면 중앙고속도로와 성을 에워싸고 휘감아 나가는 남한강의 수려한 자태가 숨을 턱 막는다.

근원경이 온통 산야다. 운무를 두른 소백 준령이 마치 우리의 혼을 키운 국토의 등뼈처럼 신령스럽다. 그렇게 수백m를 걸어가면 성벽이 가장 잘 살아있는 동북 구간이다. 튼튼하면서 날렵한 곡선을 그리며, 고도를 높이는 성벽은 신라인들의 기상이 서려 있는 것 같다. 성벽 아래는 급경사이고, 게다가 성 아래는 남한강과 죽령천, 단양천이 삼면을 가로막아 해자를 만들고 있다. 탁 트인 시야도 남북을 잇는 옛적 도로를 감시할 수 있어 천험의 요새라 할 만하다. 맑은 날이면 남한강 상류에 있는 온달성이 눈에 잡힌다고 하니 군사요충지로 두말할 나위 없다. 성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성문지가 나타나고 연이어 서쪽으로 꺾인 성벽은 무성한 풀숲으로 사라지고 만다.


한강으로 나아가는 교두보 적성산성
천오백년 전 신라 숨결·땀·힘 축조
성 에워싸 휘감은 남한강 수려한 자태

역사학자에게 우연히 발견된 적성비
고구려 적성지역 점령 후 포상·위로
신라사 연구 새로운 場 해서체 309字

청정지역 동치악산 부곡지구 트레킹
맑고 수려한 원시림로드 발걸음 가뿐
꿩의 報恩이야기 따라 나를 찾는 시간



성벽을 벗어난 길로 성재산 정상에 오른다.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거리낌없다. 일망무제다. 이곳에서 살피면 길 아래 사람들의 움직임을 손바닥 안같이 알 수 있다. 땅의 길도, 하늘의, 바람의, 역사의 길도 보인다. 신라가 한강의 상류인 죽령 이북을 점령한 것은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전초 정복사업의 일환으로 단양지역을 점령하고 적성산성을 쌓은 것이다. 그 결과 한강유역을 평정하고, 그 지역의 풍부한 물산과 노동력을 확보하고, 서해를 거쳐 직접 중국과 통할 수 있는 길을 트게 됐다. 이 같은 역사는 정상 바로 밑에 있는 적성비가 잘 말해주고 있다. 그 적성비를 탐방하러 내려간다.

◆단양 적성비 탐방

단양 적성비는 역사적 가치가 아주 높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인명과 사실을 현실적으로 반영할 역사적 자료가 태부족한 한국사에 적성비는 획기적인 사료로 등장하는데, 그 발견부터가 우연이고 흥미롭다. 1978년 1월 단국대 사학과 정영호 교수를 비롯한 유적 조사단은 단양의 적성산성에 유적조사를 왔다. 그 전날 내린 눈으로 진흙 범벅이 된 등산화를 털기 위해 평평한 작은 바위 위에 발을 올려놓는 순간 희미한 글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역사학자의 직감으로 모골이 송연해진 정 교수가 조사단원들을 모아 바위를 일으켜 세우고 흙을 조심해서 쓸어내렸다. 그러자 화강암 자연석에 음각된 글자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우연히 1500년 전 신라의 역사기록이 세상에 정체를 나타냈다. 바로 국보 198호인 단양 적성비다.

그 내용은 비면의 글자 288자와 비 파편을 통해 수습된 21자를 합쳐 309자다. 서체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해서체다. 비문은 이사부와 무력을 비롯한 신라 장군이 왕명을 받고 출정해 고구려 땅인 적성을 점령하고 난 후 공을 세운 인물을 포상하고 적성지역의 백성을 위로할 목적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이 적성비가 신라사 연구에 새로운 장을 여는 큰 기초가 되었음이 틀림없다. 적성비를 탐방하고 단양 고속도로 휴게소에 내려와 오늘의 목적지인 동치악산 부곡지구로 내달린다.

◆동치악산 부곡지구 계곡 트레킹

동치악산은 횡성 땅이다. 안흥 찐빵으로 유명한 안흥을 지나서 구불구불한 협곡길을 몇 차례 돌아 부곡지구로 들어간다. 부곡지구는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인 동치악산에 있는 작은 평야로 아주 깨끗한 청정지역이다. 부곡2리 경로당 부근에 주차하고 1.1㎞ 걸어 부곡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한다. 치악산 국립공원 알림마당을 통해 트레킹에 대한 여러 가지 사전 지식을 얻는다. 부곡지구 탐방로로 들어간다. 그냥 맑고 아름다운 길이다. 도무지 더러움이 전혀 없는 맑고 깨끗한 길이다. 녹색의 숲과 식물군으로 덮인 트레킹 로드는 문명의 짐에 등 굽은 자세를 꼿꼿이 세워준다. 조금 올라가니 갈림길이 나온다. 오른쪽은 치악산 비로봉 가는 큰 무레골 등산 탐방로이고, 왼쪽은 곧은재 가는 계곡트레킹 길이다. 나는 서슴없이 계곡트레킹 로드로 성큼성큼 걷는다. 계곡의 물소리가 풀잎 위로 굴러서 들려온다. 바람도 얼마나 시원한지 도무지 여름 같지가 않다. 나뭇잎 사이로 그림자와 함께 떨어지는 햇살이 신발 끈을 동여준다. 그만큼 발걸음이 가볍고 가뿐하다.

전망대가 있는 폭포에 이른다. 비록 크지는 않지만 완만한 흐름의 폭포수가 아름답다. 아래에 있는 소의 물빛이 너무 투명해 나의 전생까지 비춰주는 것 같다.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한다. 저 끝없이 맑은 물을 따라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처럼 나도 모르게 치악산의 옛 전설, 보은(報恩)의 맑은 이야기를 따라 헤엄친다.

옛날 한 젊은이가 적악산(오늘의 치악산)을 넘다가 꿩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큰 구렁이가 꿩을 잡아먹으려는 순간이었다. 젊은이는 활을 쏘아 구렁이를 죽이고 꿩을 구해주었다. 그날 날이 저물어 산속의 집에서 묵게 되었다. 막 잠이 깊이 들었는데 숨이 답답해 눈을 뜨니 큰 구렁이가 낮에 죽은 남편의 복수를 한다고 몸을 칭칭 감고 있는 것이다. 구렁이는 “저 산 위의 빈 절 종각에 있는 종을 세 번 울리면 당신을 살려 주겠소”한다. 젊은이는 속절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종을 울릴 수 있겠는가. 그 순간 어디선가 “땡 땡 땡” 세 번의 종소리가 들리고 구렁이는 사라졌다.

날이 밝자 젊은이가 종각에 올라보니 꿩 세 마리가 머리가 깨진 채 종 아래 죽어 있었다. 말 못하는 날짐승이지만 죽음으로 나에게 보은했으니, 내가 꿩의 죽음을 달래줘야겠다고 생각한 젊은이는 꿩들을 묻어주고 빈 절을 고쳐 거기서 살았다. 그 절이 지금의 상원사요, 그 당시까지 적악산이라 부르던 산 이름도 꿩 치(雉) 자를 넣어 치악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실로 생명의 연결고리를 청정하게 하는 전설이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꿩의 보은이다. 다시 그 맑고 수려한 원시림의 트레킹 로드를 걸어간다. 걸음의 자국 자국마다 꿩이 종에 부딪친 “땡 땡 땡” 종소리를 디디고 걷는다. 나는 과연 나에게 은혜를 베푼 생명들에게 얼마나 보은할 수 있을까. 동치악산 부곡지구 트레킹은 그렇게 생명의 저 아득한 DNA 로드를 걷는, 나를 찾는 시간이었다.

글=시인·대구 힐링 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김석 대우여행사 이사

☞여행정보

▶트레킹 코스 : 단양 고속도로 휴게소(적성비·적성산성) - 동치악산 부곡지구 부곡2리 경로당 주차 - 부곡탐방지원센터 - 부곡폭포 - 곧은재 - 부곡탐방지원센터

▶주위 볼거리 : 안흥 진빵 공장, 태종대, 구룡사, 국형사, 보문사

▶문의: 치악산 국립공원사무소 (033)732 - 5231

▶내비 주소 :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 부곡2리 경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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