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인물열전' .11] 이목

  • 김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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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09 00:00  |  수정 2018-09-21
일제 패망하자 건국사업 위해 전재산 신문제작 출연
독립투쟁 조직 ‘건국동맹’에 가입
언론인 이선장 등과 핵심멤버 활동
광복후 대구 첫 일간 민성일보 창간
정부수립 후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
수감생활 끝 징역 7년 구형 받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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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목이 창간한 민성일보는 수시로 테러를 당했고, 1948년 10월에도 기자 4명이 피검됐다. (영남일보 1948년 10월9일자)

‘해방이후 오늘날까지의 경찰이 출입기자들의 과내 출입을 엄금한 것은 요번이 처음인 것이다. 민성일보 기자검거 선풍 사건에 관하여 박 청장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민성일보의 신문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신문기자를 검거한 것이 아니라 모종 사건에 관계된 연루 혐의로 검거한 것이고 사건의 진상에 대해서는 불일내로 말할 것이다.’
 

영남일보 1948년 10월9일자는 민성일보 기자 4명의 피검소식을 전하고 있다. 신문은 경북도 경찰청장이 바뀐 후 잠잠하던 언론인 검거가 다시 잇따른다는 보도를 하고 있다. 경찰은 민성일보 본사에서 4명의 기자를 붙잡아 갔다. 경찰은 검거내용을 극비리에 붙이면서도 정작 민성일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을 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민성일보는 이 같은 기자 피검뿐만 아니라 본사가 테러를 당해 신문발행이 중단되는 일도 잦았다.
 

민성일보는 광복 해인 1945년 9월에 첫 호를 냈다. 대구의 일간신문으로는 가장 먼저 창간했다. 민성일보는 민중의 소리를 듣는 신문이 되겠다며 민성(民聲)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창간 직후부터 친일세력의 청산을 강하게 주장했던 이유도 이렇듯 백성의 여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군의 통치에 대해서도 비판적 논조를 띠었다. 10월항쟁 직후 민성일보 기자들이 구속된 것은 이 같은 미군정과의 대립적인 구도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민성일보의 정체성은 무엇보다 창간 당시의 인물에서 드러난다. 창간 때의 사장 겸 발행인은 이목이었다. 군위군 효령에서 태어난 그는 군위군 금융조합장, 배급조합장을 지냈다. 광복 후 무역회사를 경영하다가 민성일보를 창간했다. 그때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신문을 창간한 뒤 그는 사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전 재산을 운영자금으로 출연하기까지 했다.
 

그는 일찍부터 민족의식에 눈을 떴다. 일제가 사회주의 운동 탄압을 강화하던 1928년 고려공산청년회 경북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일제의 사상범 검거선풍 때는 피검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또한 일제강점기 독립투쟁을 위한 조직으로 각지의 항일운동 세력을 결집한 건국동맹에 가입했다. 그는 대구의 항일운동가 김관제와 언론인 이선장 등과 함께 건국동맹 경북조직의 핵심적 인물로 활동했다.
 

그런 그가 일제강점기 때 도평의회 의원과 경북도 의원을 지낸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명확히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경북도의원 명단에도 그의 이름은 찾을 수 없다. 당시 도평의회는 도 단위에 설치한 지방의회로 조선총독부는 조선인과 민족운동을 분열시키는 수단으로 이를 활용했다. 일제는 자문기관이던 도평의회를 1930년대에 도의회로 개편하고 의결기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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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점에서 그의 행적은 도평의회의 역할과는 어긋나는 점이 많다. 건국동맹 경북지부의 핵심멤버로 활동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일본을 상대로 독립투쟁을 하는 만큼 신체적인 위협도 컸다. 따라서 만일 그가 도평의회 활동을 했다면 지하에서 독립투쟁을 하는 자신의 신분과 활동을 위장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는 정부수립 이후 국가보안법 위반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오랜 수감생활 끝에 1950년 3월 열린 공판에서 징역 7년을 구형받았다. 그 후의 재판 상황이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을 하다 광복 후 언론계에 몸담아 활동을 이어가다 국가보안법, 군정법령, 포고령 등으로 구속된 인물들이 더러 있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이목. 그는 애초 언론사업과는 전혀 무관한 길을 걸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패망하자 새나라 건국사업을 언론부문에서 일으키려 신문경영에 뛰어들었다. 재산은 신문을 만드는데 다 바쳤다. 한때 발행부수가 가장 많았던 그 신문은 수시로 테러를 당했고 한편에서는 좌익신문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러다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민중의 소리를 들으려 일생을 바친 어느 신문인과 함께.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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