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자리는 사람도, 괴물도 만든다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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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8-02   |  발행일 2018-08-02 제27면   |  수정 2018-08-02
[영남타워] 자리는 사람도, 괴물도 만든다
허석윤 기획취재부 부장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알다시피 이 말은 대체로 좋은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어쭙잖게 보이던 사람도 괜찮은 자리에 앉게 되면 괜찮게 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필자가 자리의 긍정적인 ‘힘’을 처음으로 목격한 것은 초등학교때였다. 우리 반에 못 말리는 말썽쟁이가 있었다. 속깨나 썩었을 담임 선생님은 어느날 뜻밖의 ‘인사조치’를 단행했다. 그 녀석을 분단장에 임명한 것이다. 요즘말로 ‘신의 한 수’였다. 분단장이 된 후 그 녀석은 거짓말처럼 변했다. 약한 아이를 괴롭히거나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짓을 하지 않았다. 선생님 말 잘 듣는 모범생이 됐다. 심지어 교실 청소를 할 때는 솔선수범하기도 했다.

사람은 주어진 역할에 맞게 처신하려는 사회적 본성이 있다. 크든 작든 권한과 지위를 갖게 되면 없던 책임감이 생기고 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 녀석’처럼 좋게 변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의 경우도 허다하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망치는 것이다.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대통령들만 해도 그렇다. 어리석거나 탐욕에 눈먼 사람이 분수에 넘치게 높은 자리에 오르면 어떻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자리로 상징되는 권력의 부정적 영향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얼마든지 미칠 수 있다. 이를 입증한 실험 사례는 여럿 있다. 1971년 미국 심리학자 필립 짐바드로 교수가 실시한 스탠퍼드 모의 감옥 실험이 대표적이다. 실험은 간단했다. 모든 게 지극히 정상적인 남자 대학생 24명을 선발, 그들을 무작위로 죄수와 교도관으로 나눠 어떤 행동을 하는지 관찰하는 것이었다. 실제 상황처럼 꾸미기는 했지만 피실험자들은 실험이 단순한 역할극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실험을 시작한 지 단 하루가 지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졌다.

교도관 역할을 맡은 대학생들은 권위적이고 폭력적으로 돌변했다. 질서유지 명분으로 죄수들을 모욕하고 학대했다. 통제에 따르지 않으면 소화기를 뿌리거나 옷을 발가벗겨 침대가 아닌 바닥에서 자도록 했다. 재수없이 죄수 역할을 맡게 된 사람들은 처음에는 강하게 저항했으나 점차 자포자기했다. 스스로를 진짜 죄수라고 여기면서 극심한 무력감과 우울, 분노에 시달렸다. 일부는 정신착란 증세까지 보였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실험 진행자들의 태도였다. 그들은 죄수들이 겪는 고통을 지켜보기만 할 뿐 나몰라라 했다. 2주일간 진행하려던 실험은 외부인(짐바드로 교수의 약혼녀)의 개입으로 인해 6일 만에 종료됐다. 만약 실험이 외부에 발각(?)되지 않았다면 더욱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스탠퍼드 감옥 실험은 인간 본성의 어두운 한 단면을 대면케 한다. 무엇보다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권력적이며, 특정한 사회적 상황이 요구하는 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강함을 보여준다. 아무리 착한(혹은 그렇게 보이는) 사람도 ‘갑’의 역할을 맡으면 얼마든지 갑질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을’이 되면 굴종을 운명처럼 여길 수도 있음이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스탠퍼드 감옥 실험은 조작된 가짜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런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행동심리학의 여타 실험에서도 인간의 선한 본성이나 자유의지를 의심케하는 증거들이 쉽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실험실 밖의 역사에서도 이를 입증하는 사례는 차고 넘친다. 나치 정권하에서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한 독일군 역시 타고난 악마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었지 않은가.

유대인 철학사상가 한나 아렌트가 갈파했던 ‘악의 평범성’은 불편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진리다. 그렇지만 악은 평범성만으로는 작동되지 않는다. 사회적 악의 근원에는 거대 권력의 결코 평범하지 않은 탐욕과 흉계가 도사리고 있다. 그 음험한 권력은 우리 사회에서 정치인, 관료, 재벌이나 심지어 법관의 얼굴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자리가 만든 게 사람이 아닌 ‘괴물’일 수도 있음이니, 타인은 물론 스스로도 경계할 일이다.허석윤 기획취재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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