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소설의 분량이 말해주는 것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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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7-28   |  발행일 2018-07-28 제23면   |  수정 2018-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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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소설이라는 문학을 보다 풍요롭게 즐기기 위해 그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자 할 때 가장 먼저 챙겨두어야 할 것은 분량이다. 인터넷을 보면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이라고 해서 다음처럼 겨우 여섯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글이 돌아다니고 있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한 번도 신지 않은 아기 신발 팝니다.’ 혹은 직역해서 ‘팝니다: 한 번도 신지 않은 아기 신발’인 이 소설(!)은 헤밍웨이가 친구들과의 내기에서 지었다고 전해진다. 진위가 분명치 않기는 하지만 소설이라 생각하고 읽으면 그 의미가 제법 깊은 것은 사실이다.

이 짧은 텍스트도 소설일까를 따지는 일은 이 자리의 몫이 아니다. 그보다는 소설의 분량이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각각이 주는 효과를 음미하는 안목을 갖추는 일이 생산적이라 생각된다. 인터넷을 보면 불과 몇 단어짜리의 이야기를 쓰고 공유하는 사이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소설가 서진은 ‘한 페이지 단편소설’이라는 기획을 진행하면서 일반인들의 글을 모아 여러 권의 작품집을 출판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문인 단체 중 하나인 한국작가회의도 회보에서 한 페이지에 다 들어가는 소설을 싣고 있다. 이러한 예들이 보여주듯이 소설은 그 분량에 있어서 꽤 자유로운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의 분량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분량이 적으면 적은 대로 크면 큰 대로 그것에 고유한 형식이 있고 그것에 적합한 내용을 갖게 마련인 까닭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단편소설·중편소설·장편소설·대하소설은 물론이요, 단편의 4분의 1에서 3분의 1 정도 되는 콩트, 한 쪽 내외의 초단편, 그리고 앞서 예를 보인 바 ‘구절 소설’까지 각각의 특징을 보인다. 단편소설을 길게 늘인다고 해서 장편이 될 수 없고 반대로 장편소설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한다고 해서 단편소설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단편소설이란 대개 하나의 사건을 다루는 반면에, 장편소설은 여러 사건들을 포괄하기 마련이다. 달리 말하자면 인생의 한 단면을 포착하는 것이 단편소설의 방식인 반면 장편소설은 인간 사회의 복잡한 양상을 세세히 담아내는 특징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전문용어를 사용해 보면 이들의 차이가 좀 더 명확해진다. ‘춘향이와 이몽룡’ 혹은 ‘방자와 향단’처럼 특정 등장인물들끼리 만들어나가는 사건의 연속을 스토리-선(story-line)이라고 하는데, 단편소설은 대체로 두어 명의 인물이 만드는 하나의 스토리-선으로 이야기가 마련되는 반면, 장편소설은 그러한 스토리-선이 여러 개가 서로 이어지고 갈라지면서 전개되는 복잡한 양상을 띤다. 대하소설이란 꽤 많은 스토리-선들의 길이가 확장되고 그들 간의 관계도 복잡해지면서 대개 역사적인 시간성을 띠는 경우로 주요 특징을 잡을 수 있다. 초단편의 경우는 하나의 스토리-선으로 이루어지되 그것이 발단에서 전개·위기·절정을 거쳐 결말에 이르는 완미한 구조를 갖기보다는 대체로 반전을 이용해 급작스럽게 끝을 맺는 경우라 할 수 있고, 구절 소설이란 스토리-선 자체를 갖추지 않는 경우에 해당된다 하겠다.

소설의 분량이 갖는 의미는 작품 바깥으로도 확장된다. 좁게는 개개인의 심적 문화적 상태를 알려 주고, 넓게는 사회문화의 상황을 알려 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사회역사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장편이나 대하소설이 사랑받는 시대와 단편 혹은 초단편이 인기를 끄는 시대는 사회문화적으로 큰 차이를 가진다고 할 만하다. 개개인에 주목해 보면 어떠한 분량의 소설을 좋아하는가가 그 사람의 상태나 문화적 지위를 나타내준다고 할 수 있다. 긴 호흡의 작품을 읽을 수 있는 여유와 예술적인 안목을 갖췄을 때에야 장편이나 대하소설을 접하게 마련이니 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우리 시대에 유행하는, 혹은 내가 좋아하는 소설의 분량은 어떠한지 새삼 돌아볼 필요도 있겠다.박상준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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