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24] 성주 무흘구곡(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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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봉규기자
  • 201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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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그윽하고 맑은 곳 없어라” 무위의 삶 녹아 흐르는 대가천계곡

무흘구곡 4곡인 입암 풍경. 한강 정구는 입암에 대해 ‘유가야산록’에서 “맑고 기이하며 그윽하고 고요한 분위기는 얼마 전에 구경한 홍류동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고 표현했다.
1784년에 그린 무흘구곡도를 담은 비석들. 1곡이 있는 회연서원 앞에 조성돼 있다.
무흘구곡(武屹九曲)은 성주 출신의 학자이자 문신인 한강(寒岡) 정구(1543~1620)가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한강정사(1573년), 회연초당(1583년), 무흘정사(1604년)를 중심으로 성주 대가천 일대에 설정된 구곡이다. 무흘구곡은 성주 수륜면에서 시작돼 금수면을 거쳐 김천 증산면으로 이어지는 매우 긴 계곡에 걸쳐 있다. 정구 역시 주자의 삶을 닮고자 했고 무이구곡을 사랑했다. 그래서 주자의 ‘무이도가’를 차운한 시를 짓고, ‘무이지(武夷志)’를 증찬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흘계곡 곳곳에는 그런 그의 삶이 녹아있다. 무흘구곡은 정구의 이런 삶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정구가 직접 무흘구곡을 설정했다는 등의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주자의 무이구곡을 동경한 정구

묵헌(默軒) 이만운(李萬運·1736~1820)의 문집인 ‘묵헌선생문집’에 ‘무흘구곡도발(武屹九曲圖跋)’이라는 글이 있다.

‘우리 한강 정 선생은 회암(주희) 선생의 도를 몸소 행하셨다. 공부하며 시를 읊던 장소 중에 가장 좋은 무흘 한 구역이 있는데, 회암이 사셨던 무이와 같다. 선생이 일찍이 무이지를 증찬하고 구곡시에 화운을 하셨는데 그 뜻이 미묘하다. 이에 후인이 무흘구곡이라 이름하고 바위에 새기고 그림을 그려서 화첩을 만들어 무이의 고사를 모방했다.’

이 기록을 보면 정구가 주자의 삶을 존숭하며 그런 삶을 영위하고 싶어했지만 직접 무흘구곡을 경영한 것은 아니고, 그 마음을 받들어 후인이 무흘구곡을 설정하고 이름을 새기고 그림을 그린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후손의 기록을 보면 무이도가에 화운(和韻)한 시를 무흘구곡을 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정구는 주자의 ‘무이도가’를 화운한 구곡시 ‘앙화주자무이구곡시운십수(仰和朱子武夷九曲詩韻十首)’를 남겼는데, 이 구곡시 제목을 보면 무이구곡을 대상으로 읊은 시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후손들의 기록에 의하면 달리 보게 된다. 진암(進菴) 정각(1799~1879)이 무흘구곡을 읊은 시의 제목을 ‘경차선조문목공무흘구곡운십절(敬次先祖文穆公武屹九曲韻十絶)’이라고 달고 있다. 이를 보면 정구의 구곡시가 무흘구곡을 읊은 시인 것으로 되어 있다. 후손들은 이를 통해 정구의 구곡시가 무흘구곡을 대상으로 읊은 시라고 인식해왔다.


성주∼김천에 걸친 22㎞ 긴 계곡
정구 선생 은거하며 제자 가르쳐
朱子 무이산에 대한 깊은 경외심
무이도가 차운詩 짓고 저서 증찬

무흘구곡 직접 경영 기록은 없어
‘주자에 외람된 일’ 생각했을 수도
후손·후학 구곡 그림으로도 남겨
김상진作 ‘무흘구곡도첩’ 전해져


이처럼 정구가 무흘구곡을 경영했다고 볼 수 있으나 무흘구곡 경영과 관련한 구체적 언급은 따로 없는데, 그 이유는 이황이 직접적 구곡 경영은 주자에게 외람된 일이라고 생각한 것과 같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정구는 자신이 지은 ‘무이지발(武夷志跋)’에서 ‘무이산은 기이하고 빼어나며 맑고 고와 진실로 천하에 제일이다. 또 우리 주 선생이 도학을 공부하던 장소가 되어 만대의 아래가 수사(洙泗)와 태산처럼 우러르게 하니 진실로 우주 사이에 다시 있을 수 없는 땅이 된다. 내가 외진 곳과 늦게 태어나서 이미 선생의 문하에서 배울 수 없고 또 구곡의 하류에서 갓끈을 씻을 수 없으니 어찌 심히 불행이 아니겠는가’라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정구는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산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1604년에는 ‘곡산동암지(谷山洞庵志)’를 짓기도 했다. 주자가 머물렀던 운곡(雲谷), 무이산, 백록동(白鹿洞), 회암(晦菴) 등에 대한 서(序), 기(記), 제영(題詠), 사적(事跡)을 모아 엮은 책이다.

그는 또 이중구(李仲久) 집안에서 소장했던 무이구곡도를 볼 수 있었는데 ‘한가할 때마다 한 번씩 펼쳐보면서, 이 몸이 주자가 돌아가신 지 400여년 후 동쪽 땅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때마다 주자를 모시고 강도(講道)하며 그 가운데 가영(歌詠)하고 주선(周旋)하니 그 기상의 의미가 어떠하겠는가’라는 감회를 남기기도 했다.

성주 수륜면에서 김천 증산면까지 22㎞에 걸쳐 있는 무흘구곡은 회연서원 뒤의 바위산인 제1곡 봉비암(鳳飛巖)부터 시작된다. 제2곡이 한강대(寒岡臺), 제3곡이 무학정(舞鶴亭), 제4곡이 입암(立巖), 제5곡이 사인암(捨印巖), 제6곡이 옥류동(玉流洞), 제7곡이 만월담(滿月潭), 제8곡이 와룡암(臥龍巖), 제9곡이 용추(龍湫)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 구곡을 따라 나 있고, 곡마다 안내표지가 서 있어 찾아보기가 어렵지 않다.

◆그림으로도 그려진 무흘구곡

무흘구곡은 정구 이후 후손과 후학들에 의해 그림으로 그려지고 차운시가 지어지면서 영남의 대표적 구곡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경헌(警軒) 정동박(1732~1792)은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영재(嶺齋) 김상진에게 부탁해 무흘구곡도를 그리게 하고, 곡마다 그 명칭을 적고 직접 지은 두 수의 시를 써 넣은 뒤 첩을 만들었다. 김상진이 79세 때인 1784년에 그린 그림이고, 무흘구곡도첩으로 전하고 있다.

이만운이 이 무흘구곡도를 보고 지었을 것으로 보이는 ‘무이구곡도발’에는 다음의 내용도 담겨 있다.

‘무이정사는 순희 갑진년(1184)에 완성되고, 무흘정사는 만력 갑진년(1604)에 창건되어 지금 중건해 새기고 그린 것이 마침 갑진년(1784)이다. 하늘이 두 현인을 세상에 내면서 땅의 이름이 이미 닮고 앞뒤로 경영한 해가 또한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 시내와 산에 향기가 넘치고 안개와 구름이 눈에 가득하니 손으로 만짐에 닮은 점이 있다. 만약 월담과 용암 사이에서 선생을 모시면 사모하고 흥기하는 것이 있을 것이니, 곧 선생의 인지(仁智) 덕을 배우고자 하는 이는 또한 이 그림에서도 얻음이 있을 것이다.’

무흘구곡 차운시는 진암 정각의 ‘경차선조문목공무흘구곡운십절(敬次先祖文穆公武屹九曲韻十絶)’과 정관영(鄭觀永)의 ‘영무흘구곡시십수(詠武屹九曲詩十首)’, 최학길(崔鶴吉)의 ‘경차무흘구곡운(敬次武屹九曲韻)’으로 이어진다.

정구의 구곡시(仰和朱子武夷九曲詩韻十首)는 도학적 성격이 강해 무흘구곡의 실경 느낌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서시와 1곡시를 소개한다.

‘천하 산중에 어느 곳이 가장 신령한가/ 세상에 이처럼 그윽하고 맑은 곳 없어라/ 일찍이 주자가 깃들었으니/ 만고에 길이 흐르는 도덕의 소리여’. ‘일곡이라 여울가에 고깃배를 띄우니/ 석양 드리운 시내에 실바람이 감도네/ 그 누가 알리오 세상 근심 다 버리고/ 박달 노 잡고 저문 안개 헤칠 줄을’.

정구는 성주 출신으로 이황과 조식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통천군수, 우승지, 강원도관찰사, 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경서, 병학, 의학, 역사, 천문, 풍수지리 등 모든 분야에 통달했고 특히 예학(禮學)에 뛰어났다. 41세가 되던 1583년에 후진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금의 회연서원 자리에 회연초당(檜淵草堂)을 마련하고 방 이름은 불괴침(不愧寢), 창문은 매창(梅窓), 당호는 옥설헌(玉雪軒)이라고 지었다. 뜰 앞에는 백 그루의 매화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백매원(百梅園)이라 불렀다. 이때의 초당은 정구가 벼슬길에 나가 있는 동안 퇴락해 그가 63세가 되던 1605년에 다시 복원했다. 그의 사후 7년째가 되던 1627년 회연초당 자리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는 회연서원이 건립되었으며, 1690년 왕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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