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칼럼] 나에게로 가고, 공동체를 만드는 장소

  • 윤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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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7-10   |  발행일 2018-07-10 제30면   |  수정 2018-10-01
변하지 않는 장소 많을수록
시민들 공통된 기억량 증대
커뮤니케이션 속도 빨라져
공유 이야기가 공동체 형성
도시의 힘과 가치도 높아져
20180710
권상구 시간과 공간 연구소 이사

장소가 사라지고 있다. 우리 선조들의 장소는 거의 없다. 안동 태사묘, 경주 안압지, 대구 서문시장 등 문화재·문화유산이란 이름으로 지극히 희소한 비율로 남겨져있다. “조선시대가 어디있느냐”라는 어느 노교수의 질문처럼 2018년 현재 조선시대는 없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조선시대의 시간이 그대로 멈춘 공간이 없는 것이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는 논리는 간단하다. ‘현재의 시민’들이 ‘과거의 장소’를 지켜가는 게 ‘미래’라는 이야기다.

요즘은 교과서에서나 부모세대들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도시 속에서의 ‘과거시간’은 점점 내몰리고 있다. 즐겨갔던 다방, 대폿집, 로컬브랜드의 빵집, 영화관 그리고 식민지 시대 역주변의 장소들은 세탁되고 포맷되고 있다. ‘잘살아보세’라는 근대적 논리는 마을의 사당, 정자, 상여집, 방앗간, 빨래터 등을 없앴다. 물론 도시와 마을이 언제까지 그 모습 그대로 존속해 있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난 이런 현상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는 도시는 더 속도가 빠르다. 우리가 걷는 거리나 골목의 간판은 2년에 한번씩 바뀌고 있으며 프랜차이즈의 각축장이 되어가고 있다. 만날 때마다 우리는 약속장소를 바꿔야하는 불편함이 생긴다. 새로운 간판이 많아지는 도시가 과연 발전하는 도시일까. 2년마다 바뀌는 간판은 오히려 시행착오인 것이다. 프랜차이즈 자본주의는 이 시행착오마저 ‘트렌드’라는 이름으로 탈바꿈시킬 정도다.

도시나 마을은 새로운 모습도 필요하겠지만, 오히려 변하지 않는 장소가 많을수록 커뮤니케이션 속도는 더 빨라진다. 장소가 존속되어 있을 때 시민들의 공통된 기억의 양이 증대하며, 기억은 이야기를 발생시키며, 이렇게 구축된 스토리텔링은 도시의 힘과 가치를 높여준다. 일례로 우리가 기억하는 광화문이라는 장소가 없었다면 촛불시위도 없었고 대한민국을 바꿀 힘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장소는 기억되고 기억은 이야기를 만들며, 이렇게 공유된 이야기가 바로 공동체를 만든다. 장소가 공동체인 이유다. 어릴 때 도시를 걸어다니면 서울의 탑골공원, 대구의 달성공원이 대표하듯 중절모, 지팡이에 하얀 핫바지를 입은 할아버지들의 공간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 할아버지들은 편안하게 나들이 할 수는 장소가 없다.

이렇게 시민의 삶과 장소는 밀접하게 결연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가 장소를 떠날 때 우리의 모든 것이 장소를 떠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장한 모습으로 다시 그 학교를 갔을 때 우리는 그 장소에 남아있는 무언가를 느낀다. 운동장이, 학교건물이 너무 작아 보이는 감응을 한다. 나의 100%가 그 장소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장소에 남아있는 유년의 시간을 만나게 되며 그만큼 내가 성장했구나라는 ‘레트로(retro)’ 감응이 우리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계 지리학자 이푸투안은 바로 이것을 ‘토포필리아(topophilia)’, 즉 ‘장소애’라고 부른다. 인간은 살아가는 물리적 환경에 대해서 특정한 태도감을 가지게 되며 그 태도감은 장소를 ‘면적’이나 ‘부피’로만 인식하지 않으며 ‘기억’되고 ‘재현’되는 역동적 공간으로 탈바꿈시킨다는 것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극중 소설가 아마데우 프라두는 “그래서 우리가 어느 장소에 간다고 하는 것은 나에게로 가는 것이다”라는 표현을 남기기도 했다. 이푸투안은 또 ‘장소애’는 장소에 대한 기초적 지식이 제공되지 않으면 발생하지 않는다고 했다. ‘너가 태어난 곳은 한강 이남의 최고의 무슨 무슨…’ 이런 식으로 뽐내기만 한다고 장소애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역학을 해야 하고 그 연구를 바탕으로 향토사·지역사교육에 신경써야 하는 이유다.
권상구 시간과 공간 연구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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