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보수와 진보, 그리고 철학

  • 허석윤
  • |
  • 입력 2018-07-02   |  발행일 2018-07-02 제30면   |  수정 2018-10-01
보수 전제안된 진보 불가능
로켓도 뒷받침 없인 못날아
생성하려면 바탕이 있어야
진보는 적폐청산 씨앗 없나
2년 뒤 역사교과서에 실망
20180702
백승균 계명대 목요철학원장

보수란 전래되어 오는 풍속이나 습관을 그대로 지키려 함을 말하고, 진보는 그런 풍속이나 습관은 물론 사회제도의 변화나 발전까지 추구함을 말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서는 현상유지를 바라거나 변혁을 꾀하는 사람들이 있다. 현상유지를 고집하는 사람들을 보수주의자라 하고 변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진보주의자라 한다.

마르크스는 근대 자본주의사회에 맞서 포이에르바흐를 등에 업고 관념에 찬 철학자들을 향해 세계해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계변혁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 혁명의 기치 아래 사회변혁의 틀을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들을 향해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단결하라’는 구호를 내걸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유한다’를 궁극의 목표라고 했다. 마르크스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보수와 진보의 논쟁은 고대 그리스 사회로까지 돌아간다. 이미 2천500여년 전 그리스에는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라는 두 철학자가 맞서 다투었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있고, 왜 없지 않은가?’를 주장하면서 ‘존재’를 내세워 사회유지라는 보수의 틀을 마련해줬다. 이에 맞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흐른다’고 하여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면서 ‘생성’을 내세워 사회변혁이라는 진보의 틀을 마련했다. 파르메니데스에게는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 즉 변화하는 것이란 감성에 속하는 가상이기 때문에 비진리이고, 헤라클레이토스에게는 생성 그 자체가 본래적 존재로서 참 진리였다. 아주 단순화하면 순결을 두고 소유, 즉 존재하는 것인가 혹은 생성하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존재는 소유를 전제하고 생성은 상실을 전제한다. 존재는 무로 가는 통로이고 생성은 유로 가는 통로이다.

순수 생물학적으로만 보면 사람이 살아간다는 그 자체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해가는 것이고 경험해가는 자기 자신도 그때마다 스스로 변해야 하는 것이라면 생성이 맞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흐르는 물은 생수로서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때문이다. 사회도 정적이기만 하면 탄력성을 잃고 결국 정체성에 빠지게 되나 동적인 사회는 역동성의 사람들로 가득 차 생동감이 넘친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사회변혁을 이룩하고 늙은이들은 보수사회만을 고집한다 하여 한때는 노인폄훼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진정 그럴까! 논리적으로는 물론 현실적으로 봐도 존재가 전제되지 않는 생성은, 즉 보수가 전제되지 않는 진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생성하려면 먼저 그 바탕이 있어야 하고 그 바탕이 존재일 때 비로소 새로운 생성이 가능하게 된다. 로켓도 뒷받침 없인 날 수가 없다. 보수 없는 진보는 진보의 참 형태를 드러내 보일 수 없는 것이다. 진보 그 자체는 진보가 아니라 전체에 대한 역행이고 불행이며, 더 나가면 일방적인 미래의 폭력이 된다.

그렇다면 어찌 보수에게만 적폐청산이 해당되고 현재 진보에게는 적폐청산의 씨앗들이 없단 말인가! 단적인 예로서 2년 뒤 우리 역사교과서 집필에 어떤 정정당당한 민주적 절차 없이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고 ‘민주주의’로만 기재하겠다는 것이나, 1948년 8월15일을 ‘대한민국수립’이 아닌 ‘대한민국정부수립’으로 기재하겠다는 것도 공론화하지 않고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해 왔다. 처음에는 국민여론을 의식하여 교육부 담당자의 실수로 ‘자유’가 빠졌다고 하더니, 그 후에는 이낙연 국무총리마저 “총리가 동의하지 않으면 정부의 입장이 아니다”고 했다가 이제 와서는 노골적으로 확정하여 교과서에 기재한다니! 그것도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이 민주주의가 내포하는 자유·평등·인권·복지 등 다양한 구성요소들 중 그 일부만 의미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라는 표현이 더욱 적합하다는 말은 국민을 무엇으로 보고 하는 소리인가! 좀 솔직했으면 좋겠다. 더구나 독일기본법을 운운하면서 학계 주장이라고도 하고, 심지어는 집필진에 자율성을 주기 위해서라고 하니 너무 비겁하고 치사스럽다. 참 비민주적이다. 이런 적폐야말로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적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백승균 계명대 목요철학원장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