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목례의 정치학

  • 박규완
  • |
  • 입력 2018-06-21   |  발행일 2018-06-21 제31면   |  수정 2018-06-21

우리가 일상으로 쓰는 언어 중에도 뜻을 적확히 모르거나 철자법이 틀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첩(大捷)을 대전(大戰)으로, 묘령(妙齡)은 ‘나이를 알 수 없는’이란 뜻으로 흔히 착각한다. 복불복, 삼우(三虞), 스프링클러, 프랑켄슈타인, 염치 불고하고, 소담스럽다, 수인사(修人事) 같은 어휘 역시 잘못 이해하거나 오용하는 빈도가 높다. 목례와 묵례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대부분 목례를 고개를 숙이는 인사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국어사전엔 목례(目禮)를 ‘가벼운 눈인사’로 풀이하고 있고, 묵례(默禮)는 ‘말없이 고개만 숙이는 인사’로 적시돼 있다. 그러니 고개를 숙이며 하는 인사는 목례가 아닌 묵례가 맞다. 하지만 인사를 나누며 말을 하면 이미 묵례가 아니다.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북측 수행원들이 인사할 때는 간단한 말이 오갔다. 북측 수행원이 고개를 살짝 숙였지만 눈을 마주 보며 인사했기 때문에 이땐 목례라고 하는 게 옳다.

국가 정상 간 인사를 나눌 때는 서로 고개를 숙이지 않지만 정상과 악수를 하는 수행원들은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게 외교관례다. 목례든 묵례든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관례일 뿐 철칙은 아니다. 실제 현장에서도 외교관례가 반드시 통용되진 않는다.

지난 14일 청와대를 방문한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문재인 대통령과 악수할 때 한 손으로 문 대통령의 팔을 잡았다. 친근감의 표시일 수도 있지만 장관이 정상의 팔을 잡는 건 결례다. 폼페이오는 지난달 평양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악수할 때도 똑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한데 폼페이오는 중국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만날 땐 그러지 않았다. 평창올림픽 때 문 대통령에게 턱을 빳빳이 쳐든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도 시진핑에겐 90도로 고개를 꺾었다. 목례 자세와 국가 파워의 함수관계가 은근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지난번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때 노광철 북한 인민무력상에게 거수경례를 한 트럼프 대통령을 두고 미국에서 찬반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먼저 경례를 한 노광철에 대한 화답이었다는 평가와 적성국 장성에 대한 부적절한 행동이었다는 반론이 엇갈린다. 어쨌거나 목례와 묵례에도 나라 간 정치 역학이 작용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박규완 논설위원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