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22] 문경 대야산 선유구곡(上)...신선 노닐던 선유동계곡…광복 맞은 독립운동가의 감격이 흐르는 듯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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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14 09:05  |  수정 2021-07-06 14:45  |  발행일 2018-06-14 제24면
[九曲기행 .22] 문경 대야산 선유구곡(上)
문경 대야산의 선유동계곡에 있는 선유구곡의 4곡인 세심대 주변 풍경. 선유구곡은 구곡 중 보기 드물게 경치가 수려한 계곡이다.
[九曲기행 .22] 문경 대야산 선유구곡(上)
마음을 씻는 대라는 의미의 ‘세심대’ 글자가 새겨진 바위.

선유(仙遊). 신선이 노닌다는 의미의 이 이름이 들어가는 지명이 우리나라에 적지 않다. 이런 지명을 가진 곳 중 문경 가은의 선유동(仙遊洞)계곡은 말 그대로 신선이 노닐 만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계곡이다. 이 계곡은 문경 대야산(해발 931m)에 있다. 대야산의 이 계곡 말고 괴산 쪽으로 흐르는 계곡도 수려한데 역시 선유동계곡이라 한다. 그래서 헷갈리기도 하는데 기호지방 유학자들은 자신이 속한 괴산 선유동을 선유동 혹은 내선유동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영남 유학자들은 자신의 고장인 문경 선유동을 내선유동이라 하고, 괴산 선유동을 외선유동이라 했다. 고산자 김정호는 괴산 선유동을 그냥 선유동이라 하고, 문경 것을 내선유동이라 했다. 상주 출신의 선비인 우복(愚伏) 정경세(1563~1633)는 이렇게 노래했다. ‘두 선유동 사이좋게 서로 이웃이 되었는데(兩仙遊洞好相隣)/ 중간에 있는 한 고개로 구름이 떠가는구나(只隔中間一嶺雲)/ 이름난 명승을 두고 우열을 논하지 말게(莫把名區評甲乙)/ 조물주는 시내와 바위 공평히 나눠주었다네(天將水石與平分)’. 정경세는 이런 시를 지으면서 문경의 것을 동선유동, 괴산의 것을 서선유동이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가은읍 완장리 시내 1.8㎞ 구곡
일제때 옥고 치른 정태진이 설정
1947년 은거 문집에 구곡詩 남겨
아홉 굽이마다 명칭 새겨놓은 돌
언제 누가 했는지 확인되지 않아

◆정태진이 1947년에 설정한 구곡

문경 선유동, 즉 동선유동의 아름다움은 ‘완장(完章)’이라는 마을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정경세는 선유동 산수의 기묘함과 수려함에 감탄해 이 동네에 이르러 ‘가이완장운(可以浣腸雲)’이라고 했다 한다. ‘골짜기가 탁 트여 창자가 시원하다’는 뜻인데, 현재의 완장이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지사(地師)로 종군했던 풍수가 두사충이 백두대간을 넘어 이곳으로 들어서다 선유동 경관을 보고는 창자가 시원하다며 완장(浣腸)이라 한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문경 선유동계곡의 선유구곡은 외재(畏齋) 정태진(1876~1956)이 설정해 경영한 구곡이다. 문경 선유동과 관련된 인물로는 이전에 선유동에 옥하정을 짓고 머물렀던 손재(損齋) 남한조(1744~1809)가 유명하다.

정태진은 항일 독립운동가로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했는데, 1919년 4월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에 서명했다. 이후 독립운동 군자금 확보에 힘쓰다가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문경 가은에 은거했다. 정태진은 문경에 머물며 선유동을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이곳을 찾은 것은 광복 후인 1947년 5월(음력)이다. 당시의 감흥을 그는 이렇게 읊었다. 선유구곡시 서시다. 정태진의 문집(외재집)에 나온다.

‘10년을 꿈꾸다 이렇게 한 번 찾아오니(十載經營此一遊)/ 선유동문 깊숙한 곳 흥취가 끝이 없네(洞門深處興悠悠)/ 맑은 시내 굽이굽이 원두에서 흘러오고(淸溪曲曲靈源瀉)/ 늙은 돌은 울룩불룩 푸른빛이 감도네(老石積翠浮)/ 아득히 오랜 뒤에 은자 자취 찾아보는데(曠世蒼茫追隱跡)/ 어느 때나 터를 닦고 좋은 계책 얻을까(幾時粧點獲勝籌)/ 한 해가 다 가도 선약 얻을 소식 없으니(金丹歲暮無消息)/ 부끄러이 세상을 향해 백발을 탄식하네(羞向人間歎白頭)’.

선유구곡은 문경 가은읍 완장리 앞으로 흐르는 시내를 따라 1.8㎞에 펼쳐진 구곡이다. 선유구곡 아홉굽이에 굽이마다 이름을 돌에 새겨놓았는데,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아홉굽이의 이름은 1곡 옥하대(玉霞臺), 2곡 영사석(靈石), 3곡 활청담(活淸潭), 4곡 세심대(洗心臺), 5곡 관란담(觀瀾潭), 6곡 탁청대(濯淸臺), 7곡 영귀암(詠歸巖), 8곡 난생뢰(鸞笙瀨), 9곡 옥석대(玉臺)다.

◆정태진의 선유구곡시

‘흰 바위에 아침 햇살 비추어 밝게 빛나고(白石朝暾相暎華)/ 맑은 시내 찬 물결에 안개 붉게 피어나네(晶流寒玉紫騰霞)/ 새긴 글씨 한가로이 찾지만 확인하기 어렵고(閒尋題字迷難辨)/ 옥하대 위 허공 멀리 흰 구름만 떠가네(只有白雲帶上遐)’

아주 넓은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는 1곡 옥하대는 ‘아름다운 안개가 드리우는 누대’라는 의미다. 정태진은 이 1곡시 위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곳이 선유구곡의 제1곡이다. 옛날에는 새긴 글자가 있었으나 큰물에 갈라져 지금은 그 장소를 알아낼 수 없다.’

‘너럭바위 뗏목 삼아 신령을 찾아가다(以石爲喚作靈)/ 시내 속에 정박한 지 아득히 오랜 세월(中流停著歲冥冥)/ 곁의 벼랑에도 선인의 자취 남아 있으니(傍崖又有仙人掌)/ 한 길로 원두 찾으면 신선을 만날 수 있으리(一路窮源指可聽)’.

1곡에서 조금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나오는 2곡 영사석은 ‘신령스러운 뗏목 모양의 바위’라는 뜻이다. 수량에 따라 잠기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는 영사석 너럭 바위 위에 ‘영사석’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무이구곡처럼 배를 띄울 수 있는 계곡은 아니지만, 너럭바위를 신선이 타던 뗏목으로 생각하고 원두를 찾아가려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원두는 선유구곡을 흐르는 물이 발원하는 곳을 말하는데, 도의 근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 신선은 도가의 신선이라기보다는 유학자이니까 유가의 도를 구현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정처에서 동처를 마음으로 바라보니(靜處從看動處情)/ 못 속이 활발하여 못물이 깨끗하네(潭心活活水方淸)/ 본래 맑고 활발함 흐리지 말게(本來淸活休相)/ 한 이치 허명하면 도가 절로 생기리라(一理虛明道自生)’.

3곡 활청담은 얕은 못인데, 4곡에서 흘러오는 물이 이곳에서 활청담을 만든 뒤 2곡을 향해 흘러간다. 이 활청담은 흘러드는 물로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항상 맑음을 유지한다. 그래서 활청이라 한 것이다. 이런 자연을 보면서 맑고 활발한 마음을 흐리게 하지 말아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허명한 이치가 본디 내 마음이거늘/ 부질없이 세상사에 깊이 물들었네/ 이 대(臺)에 이르러 한 번 씻을 생각하니/ 어찌 묵은 때를 추호라도 두겠는가’.

4곡 세심대를 노래하고 있다. 이곳에는 사각형의 바위가 비스듬히 서 있는데 여기에 ‘세심대’라는 글자가 전서로 새겨져 있다. 그 앞으로는 너럭바위 위로 맑은 물이 흘러간다. ‘허명’은 비어 있지만 맑다는 의미다. 마음이 비어 있으면서 밝고 맑은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 선비들의 자세이자 정태진의 화두이기도 했을 것이다.

세심대 바위에 보면 ‘구로천(九老川)’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구로(九老)’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772~846)가 향산에 은거해서 주변의 노인 8명과 함께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를 만들어 시를 지으며 노년을 즐긴 고사에서 비롯된 말인데, 이 글씨는 1933년 4월 김태영을 비롯한 순천김씨 아홉 노인들이 이곳에 은거하며 새긴 것이라고 한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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