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공 치러 가자

  • 원도혁
  • |
  • 입력 2018-06-11   |  발행일 2018-06-11 제31면   |  수정 2018-06-11
[월요칼럼] 공 치러 가자

테니스 애호가인 나는 요즘 프랑스 오픈 테니스 중계 보는 재미에 빠져 있다. 프로 고수들의 환상적인 플레이를 보고 배울 기회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에이스 정현 선수가 출전하지 못해 아쉽고, 정해진 응원 대상은 없다. 수준 높은 경기 자체를 즐기는 편이다.

테니스와 골프는 격이 다른 운동이다. 공통점은 있다. 같은 구기종목으로 애호가들이 서로 취미를 물을 때 ‘공 친다’로 표현하는 범주에 든다. 다만 테니스 동호인은 ‘나는 큰 공, 살아 있는 공 치는데…’로 표현을 약간 달리할 뿐이다. 그러면 골프 애호가들은 ‘죽은 공 살리기 더 힘들더라’며 맞장구를 친다. 둘 다 ‘스윙해서’ 스트레스를 푸는 운동이다. 딱딱한 작은 흰 공은 클럽으로, 말랑한 노란 공은 라켓으로 친다. 그런데 두 운동의 위상은 한국과 미국·영국에서 크게 다르다.

테니스가 한국에 들어온 시기는 조선 말 대한제국 때인 1900년 전후로, 영어권 선교사들이 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교사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공을 쫓아 다니는 것을 목도한 조정 대신들의 촌평은 ‘하이고, 저렇게 힘든 짓을 아랫것들에게나 시키지 뭣하러 하나’였다나. 필자도 공감한다. 하지만 흙을 밟으며 맑은 공기 속에서 뛰놀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안 해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이 테니스는 한국에서는 일반인 다수가 즐기는 ‘서민 운동’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귀족 스포츠’다. 우선 구장 입장료도 테니스가 골프보다 두세 배 이상 비싸다. 필자가 몇 년 전 미국 피츠버그에 갔을 때 이 도시에 골프장이 72개나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퍼블릭의 입장료는 1만원 안팎이었다. 당시 피츠버그에서 두 시간 거리의 클리블랜드에 살던 한 지인은 “입장료 1만원도 비싸서 8천원짜리 찾아 다닌다”고 했다. 단돈 8천원 내고 들어가 손수 카트 끌면서 하루 종일 골프를 칠 수 있는 곳이 땅 넓은 스포츠 대국 미국이었다. 이러니 미국에서는 골프가 귀족 스포츠가 아닌 대중운동인 셈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골프 한 번 치려면 20만원 이상 준비해야 한다. 입장료(퍼블릭의 경우 평일 6만~7만원, 주말엔 12만~13만원)와 캐디피 등 지출이 만만찮다. 1인당 2만~3만원만 내면 되는 테니스보다 5배 이상 돈이 든다. 골프 클럽은 또 얼마나 비싼가. 사정이 좀 나아졌지만 한국에서는 골프가 여전히 귀족 스포츠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한국과 만반대다.

영국에서 테니스의 위상은 대표적인 대회인 윔블던의 상금 규모만 봐도 알 수 있다. 단식 본선 1회전에서 탈락해도 3만9천파운드(약 5천700만원)를 받는다. 윔블던 대회 주최 측이 최근 발표한 올해 윔블던의 총상금은 3천400만파운드(약 500억원)다. 지난해 3천160만파운드에서 7.6%나 올렸다. 남녀 단식 우승자에게는 225만파운드(33억1천만원)가 주어진다. 가히 귀족 스포츠라 불릴 만하다. 윔블던과 함께 4대 메이저 대회로 꼽히는 호주 오픈·프랑스 오픈·US 오픈도 상금 규모가 비슷하다. 따라서 4대 메이저 대회에 모두 출전해 1회전에서 떨어져도 2억원 정도의 상금을 챙길 수 있으니 굉장하지 않은가. 그런데 테니스 4대 메이저 대회 조직위는 올해부터 ‘50-50 규정’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다. 부상 선수가 1회전 경기 전에 기권하면 상금의 50%를 지급하고, 나머지 50%는 대기 순번자에게 주자는 것이다. 1회전 탈락 상금 5천여만원을 포기할 수 없어서 부상 중에도 억지로 경기에 참가해 대충 몇 게임만 건성으로 때우다가 1세트 도중 기권하고 가는 ‘생계형 선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지난해 윔블던에서는 1회전 기권자가 7명이나 나와 관람객의 비난을 샀다. 무리하게 출전해 경기 중 일찍 기권하거나, 1회전을 다 치러도 현저하게 낮은 경기력을 보인 선수에게는 한 푼도 안 주기로 했다. 대회 명성에 흠이 나는 것을 방지하고, 대기 순번자에게도 좋은 합당한 처방전을 낸 것이다. 테니스와 골프에 대한 위상은 동서양이 이렇게 다르다. 그렇더라도 골프든 테니스든 한국에서 운동을 권유할 때 다들 이렇게 외친다. “공 치러 가자.”

원도혁 논설위원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