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데자뷰’ 남규리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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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08   |  발행일 2018-06-08 제43면   |  수정 2018-06-08
“환각 시달리는 불안정한 인물…그동안 쌓인 연기 갈증 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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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은 매일 공포스러운 환각에 시달린다. 약혼자인 우진(이규환)과 함께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인 후부터다. 현실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소름 끼치는 일들이 반복되자 지민은 결국 경찰서를 찾아가 자수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날 밤, 어떤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미스터리 스릴러 ‘데자뷰’로 오랜만에 얼굴을 비친 남규리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영역을 시시각각 넘나드는 미스터리한 인물 지민을 연기했다. 장편영화의 주연을 오랜만에 꿰찼다는 기쁨도 크지만, 주연으로서의 책임감과 부담감 역시 공존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달 30일 개봉한 ‘데자뷰’는 대작영화의 틈바구니에서 한창 고전 중이다. 걱정과 불안이 없을 수는 없지만 모든 열정과 노력을 쏟아부은 터라 후회는 없다. 그보다는 “그동안 쌓여있던 연기적 갈증을 마음껏 분출할 수 있는 소중한 창구가 됐다”며 특유의 긍정 마인드를 발동하는 그녀다.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연약하고 여린 이미지와 달리 남규리는 누구보다 강한 멘탈을 지녔다. 배우로서 삶을 대하는 태도 역시 진지하고 적극적이다. “평소에도 물 흐르듯 살려고 노력하고, 내 바깥의 일들에 너무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는 삶에 달관한 철학자의 느낌마저 풍겨난다. “짜여있는 분명한 캐릭터보다 실험정신이 강한 인물에 흥미를 느낀다”는 남규리에게 지민 역은 “연기하기가 어렵고 디테일에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반갑게 마주할 수 있는 캐릭터였다. 또한 그녀의 실제 삶이 반영된 지점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웠다. “결국 나로부터 시작해야 좀더 깊고 솔직한 연기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많이 대입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남규리는 지민의 불안한 심리를 미세한 작은 숨결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성공적으로 완성해냈다. 그녀의 발걸음이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고 경쾌했던 이유다.


“피해자·가해자 영역 넘나드는 미스터리한 인물
짜여진 캐릭터보다 실험 정신 강한 배역에 매력
그동안 능동적·주체적인 삶…나와 지민과 부합
촬영회차 짧아 하루 두세시간 정도 자며 강행군
세세한 감정 디테일 필요…감독님과 많은 소통”

“연기 몰입해 패닉빠지기도…스태프에 칭찬 받아
많은 시간 준비해 3분간 무대, 가수 생활 공허함
연기하며 맘속 꾹꾹 담아 놓았던 것 발산 성취감
독립영화 ‘한공주’ 같은 작품도 너무 하고 싶어
신뢰주는 스펙트럼 넓은 배우로 성장위해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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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스크린을 찾았다. ‘신촌좀비만화’(2014) 이후니까 공백이 좀 있는 편이다.

“능동적인 캐릭터를 찾고 있었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삶도 능동적이고 주체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에 부합된 캐릭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중 만난 게 ‘데자뷰’였다. 혼란과 불안을 겪고 있는 지민은 녹록지 않은 캐릭터지만 내가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의 호흡이라고 생각했다. 액션도 등장하지만 드라마 ‘무정도시’(2013)를 통해 이미 어느 정도 단련해 놓은 상태라 부담스럽진 않았다. 여러모로 나에겐 큰 도전이었던 작품이다.”

▶촬영 회차가 짧았다. 그만큼 집중력을 요했던 현장이었을 것 같다.

“나는 딱 하루만 빼고 늘 촬영장에 있었다. 잠도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만 잤다. 거의 모든 회차에 등장하다 보니 36시간 꼬박 눈을 뜨고 배우들과 번갈아 가면서 촬영을 한 적도 있다. 미니시리즈가 아무리 힘들다 해도 여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물론 쉽지 않을 거라고 처음부터 각오는 단단히 했다. 그 모습을 좋게 봤는지 스태프들이 나를 추천해준 덕에 2주만에 다시 영화 ‘질투의 역사’에 출연하게 됐다.”

▶당신의 그런 열정과 노력을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칭찬하더라.

“오랜만에 손편지도 받았다. ‘작은 영화지만 좋은 연기를 해줘서 고맙다’고 적혀 있었다. ‘질투의 역사’ 때는 두 장의 손편지와 함께 캐시미어 목도리를 선물로 받았다. 감독님이 아내 선물을 고르면서 내 것도 같이 골랐다고 하더라. 많은 감동을 받았다. 덕분에 작년에는 뜻깊은 한 해를 보낸 것 같다. 함께 작업했던 많은 스태프와 친구가 됐고, 모두 나의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평소 멘탈이 강한 편인데 환각에 시달리는 불안정한 인물을 연기했다. 어려움은 없었나.

“어려웠다. 그래서 감독님의 디렉션을 빨리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데뷔작인 ‘고사: 피의 중간고사’(2008년, 이하 고사) 때는 연출을 맡은 창감독님과 뮤직비디오 작업을 통해 몇번 호흡을 맞춰 본 경험이 있다. 연기까지 직접 시연을 해줘 어떤 느낌인지 알기가 쉬웠다. 반면 ‘데자뷰’는 감독님이 추구하는 방향과 디테일을 찾기가 조금 힘들었다. 그래서 궁금하거나 의문이 날 때마다 차를 몰고 제작사를 찾아가 감독님과 만났다. 쓸데없는 농담부터 캐릭터 분석까지 다양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조금씩 소통이 이뤄졌다.”

▶지민 캐릭터에 본인의 모습을 투영시켰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나는 약을 먹어본 적이 거의 없다. 술과 담배도 안한다. 연기적으로 스킬이 필요할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는데 지민은 가짜로 하면 너무 티가 날 것 같았다. 술 먹는 연기를 할 때도 눈을 보면 가짜인지 진짜인지 알 수 있다. 눈이 가짜면 물리적인 것에 의한 신체적 반응은 더 금방 드러난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너무 편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음식을 먹고 잠을 자는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매니저가 나를 챙기고 지인들이 찾아오는 것까지 차단했다. 촬영장에서도 스태프와는 인사와 필요한 소통 외에는 가급적 거리를 뒀다. 그렇게 나를 가두어 놓다보니 연기적 접근은 수월했지만 정신적·육체적 피로는 많이 쌓였다.”

▶촬영을 하면서 본인 체중이 줄어드는 것도 몰랐다고 했는데 그 정도로 몰입을 했다는 얘기인가.

“연기에 너무 몰입해서 패닉 상태에 빠진 적이 몇 번 있다. 그 때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이 나중에 뒤풀이 현장에서 ‘뭉클했다’ ‘진짜 팬이 됐다’며 좋은 얘기를 많이 해줬다. 그리고 몸무게가 줄고 있는지도 촬영 중에는 전혀 몰랐다. (이)규환 오빠가 어느날 ‘너 몸이 왜 그러냐. 해부학실에 있는 뼈가 움직이는 것 같다’고 말해서 그런가보다 했다. 솔직히 그런 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그만큼 정신적·육체적으로 많이 힘든 촬영이었다. 문제는 지금도 살이 계속 빠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해소했나.

“몰입할 다른 일이 생기면 금방 해소된다. 대신 없으면 문제가 생기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질투의 역사’를 바로 찍게 돼서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일하면서 노는 게 즐겁고 부담없다.”

▶데뷔 때와 비교해서 크게 변화되거나 달라진 점은 뭐라고 생각하나.

“영화와 드라마에서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이 달라졌다. 그런 변화를 캐릭터로 보여줄 수 없었을 뿐이다. 연기는 뮤직비디오를 찍다가 감독님이 권유해서 시작하게 됐는데 그 때는 영화 현장에 있는 게 마냥 신기하고 즐거웠다. 원래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다만 가수(걸그룹 씨야)가 아닌 연기자로 설 때는 또 다르다. 내가 활동하던 시기만 해도 가수가 연기하는 걸 되게 낯설게 생각했다. 나는 그런 과도기에 연기자로 데뷔한 첫 주자나 다름 없었는데, 아이돌이 연기를 한다고 하니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광고 찍는 것조차 되게 조심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얘기지만 그 때는 그랬다. 내가 연기에 흥미를 갖게 된 건 ‘고사’를 찍으면서다. 가수는 많은 시간을 준비해서 3분 정도 노래하고 무대에서 내려오면 끝인데 그게 늘 공허하고 허탈했다. 하지만 연기는 내 안에 꾹꾹 담아 놓았던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표현하고 발산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성취감이 컸다.”

▶최근 소속사를 나와 혼자 활동하고 있다.

“나의 연기적 지향점과 부합되는 회사를 알아보고 있다. 그간 회사의 반대가 심해서 평소 하고 싶었던 독립영화와 연극을 하지 못했다. 한 번이라도 비상업적인 작품에 출연하게 되면 방향성이 달라지고 값어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회사입장에선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내 생각과는 달랐다. 대중에게 익숙한 모습만 보여주고 식상함을 안기는 것보다 공백을 갖더라도 남규리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게 의미있고, 결과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물론 공백기가 길다는 건 내가 아직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얘기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은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연기를 할 바에는 그냥 숨만 쉬는 한이 있더라도 좀더 기다리면서 내가 연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 예를 들면 ‘성실한 나라의 엘리스’나 ‘한공주’ 같은 독립영화인데 너무 하고 싶다. 그런 작품을 통해 나를 성장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상업영화를 만났을 때, 보다 분명한 시너지 효과를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의미있는 작업이란 무엇인가.

“시대를 반영하거나 혹은 캐릭터가 굉장히 독특해서 도전정신을 불태우는 그런 영화인데 대부분 독립영화에 많다. 하지만 그조차도 경쟁률이 너무 높다. 솔직히 그런 영화라면 출연료를 받지 않더라도 출연하고 싶다. 내 상황이 여유롭고 편안해서가 아니다. 다만 어떤 상황에서든 긍정의 마인드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당장은 힘들어도 너무 흔들리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늘 다짐한다. 그래야 내 삶도 거기에 맞춰 긍정적으로 흘러갈 수 있다. 물론 쉬운 길도 있지만 사람에게는 절대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뎌내고 보내느냐에 따라 결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고지식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그게 나름 자유롭게 살아가는 내 방식이다.”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나.

“신뢰를 줄 수 있는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다. 내 안의 다양성은 내가 알고, 지인들이 아는데 이를 마음껏 분출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다. 앞으로는 자주 생겼으면 좋겠다.”

글=윤용섭기자 hhhhama21@nate.com
사진제공=스톰픽쳐스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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