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인물열전’ .4] 대구기생 앵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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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07   |  발행일 2018-06-07 제29면   |  수정 2018-06-15
폐교위기 대구 교남학교에 건물 등 재산 태반 통 큰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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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관기 앵무는 폐교 직전에 몰렸던 교남학교를 살리기 위해 거금 2만원 상당을 기부했다. (조선민보 1937년 4월27일자)

1945년 8월 하순경. 여전히 광복의 기쁨으로 들썩였다. 대구 신정교회(현 서문교회)에서는 미군 환영음악회 준비가 한창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미군이 들어오기 전이므로 예술인끼리의 공연이었다. 종합음악협회가 주도한 이 행사의 국악공연에는 특별한 인물이 등장했다. 팔순을 넘긴 나이에도 가야금을 뜯고 학춤을 췄다. 대구기생 염농산(廉山), 바로 앵무였다.

‘대구기생 앵무가 국채의금 백원을 수력하는 것이 국민의 의무이거늘 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한 푼이라도 더 낼 수가 없으니 누구시던지 기천원을 출연하면 저사 수행한다 하니 이 기생은 참앵무 같은 기생이로고’

평생을 기생으로 살았지만
베풀 줄 아는 반듯한 삶 살아
국채보상운동에 100원 쾌척
방천 쌓고 고아원돕기 모금 등
대구경북민 일에 발벗고 나서


앵무는 일찍이 남달랐다. 1907년 3월28일자 대한매일신보는 앵무의 그런 모습을 전하고 있다. 일제에 진 빚을 갚자는 대구의 국채보상운동에 100원을 쾌척했다. 신문 보도에는 당시의 시대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여성이 남성보다 한 푼이라도 더 낼 수 없으니 누구라도 더 내는 사람이 있다면 힘을 다해 내겠다는 것이다. 앵무의 통 큰 행보를 확인할 수 있다. 기사 속의 ‘저사’는 죽기를 마다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미다.

1918년 8월 중순, 대구에는 큰비가 내렸다. 강과 냇가의 물이 넘쳐 다리가 유실되고 방축이 무너졌다. 자동차의 운행이 중지되는 등 교통상황도 엉망이 되었다. 대구 부근의 동쪽이나 서부의 군읍도 물바다가 됐다. 경북의 성주와 김천 등에도 물난리가 났다. 농사를 망친 농민들이 삶의 의욕을 잃었다는 소식이 대구 기생조합에 날아들었다.

이듬해 봄, 앵무가 움직였다. 물난리로 용암 방천이 떠내려간 성주군 용암면을 찾았다. 농사지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농민들을 위해 방천을 쌓아 돕기로 했다. 방천을 쌓는 데 적지 않은 비용(재물)이 들었지만 아끼지 않았다. 농민들은 방천을 쌓도록 한 앵무의 이야기를 ‘염농산제언송덕비’에 새겼다. 물난리를 겪지 않고 농사를 짓게 된 고마움을 나타냈다. 공덕비는 ‘앵무 빗돌’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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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이 아니다. 앵무는 대구의 관기를 이끌고 경성고아원 돕기 모금 공연을 펼쳤다. 특히 어려움에 처한 대구와 경북의 주민들을 위하는 일에는 늘 발 벗고 나섰다. 1934년 여름에는 만경관에서 수해 입은 주민들을 돕기 위해 연주회를 가졌다. 이 연주회에는 무려 800명이 넘는 관객이 몰려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당시 앵무는 이 연주회를 주최한 달성권번 기생들의 으뜸이었다.

‘풍전등화와 같이 폐교의 비운에 당면하고 있는 바로 그때 부내 전정(지금의 화전동) 염농산 여사가 이십일일 동교로 시가 이만원의 택지 및 건물의 기부방안을 스스로 말해 와서 사회에 근래 드문 감격을 주고 있는~.’

조선민보 1937년 4월24일자 기사다. 대구 유일의 민간학교로 16년간 인재를 길러냈던 교남학교(현 대륜중고)가 경영난에 빠졌다. 동창회 등이 나서 학교를 살리려 온갖 노력을 다했지만 허사였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폐교가 결정될 즈음에 앵무는 거금 2만원에 달하는 택지 및 건물을 기부했다. 자신이 가진 재산의 태반에 이르는 큰돈이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앵무는 아무렇지 않게 했다.

결코 대접받지 못하는 비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기생으로 평생을 살았던 앵무. 하지만 그는 자신의 힘겨움과는 상관없이 베풀 줄 아는 반듯한 삶을 살았다. 그의 자취는 빗돌 하나에 새겨졌지만 성주 농민들, 대구 관기들, 대구 부민들, 대구 학생들에게 희망의 촛불을 밝혔다. 그리고 언제나 부르고 싶은 이름, 앵무가 되었다.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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