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석의 電影雜感 (전영잡감) 2.0] 이창동 감독 신작 ‘버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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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01   |  발행일 2018-06-01 제43면   |  수정 2018-06-01
8년 만에 돌아온 이창동…관객에게 안기는 더 큰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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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관객들은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내게 영화 ‘시’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 서거에 대한 (참여정부에서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이창동 감독의 헌사처럼 보였다. ‘시’의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아무 음악도 없이 강물 소리만 흐르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가슴이 서늘했던 그 날의 ‘체험’을 잊을 수 없다. 그래서 더 이창동 감독의 신작을 기다렸다. 하지만 좀처럼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게 8년이나 걸릴 줄은 몰랐다. 영화 ‘버닝’ 이야기다.

‘버닝’은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 정체불명의 남자 벤, 종수의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 이 세 사람의 만남과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비밀스럽고 강렬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종수와 해미의 삶에 불쑥 들어온 벤이 두 사람의 인생에 균열을 일으킨다. 자신의 취미를 비밀스럽게 고백하는 벤, 흔들리는 종수, 벤이 고백했던 날 이후 사라진 해미까지 이창동 감독의 전작에서는 본 적 없었던 미스터리한 스토리를 뚝심있게 밀고 나간다. 영화 중반부 해미의 실종 이후부터 전개되는 벤을 향한 종수의 의심과 추적, 그리고 벤의 행적들은 끝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한다.


알바생·동네 친구·정체불명의 남자
그들사이 비밀스럽고 강렬한 이야기
사라진 친구, 끝없는 의심·추적·긴장

캐릭터 완벽소화 연기파 배우 유아인
美 드라마 ‘워킹데드’ 인기 스티븐 연
감독이 오디션으로 발굴 신예 전종서

트렌드·콘셉트 거리두며 대중과 소통
1기 박하사탕·오아시스, 2기 밀양·시
신작 ‘버닝’ 3기로 넘어간 듯한 작업

칸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세계 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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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의 이창동 감독과 배우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 (위에서부터).

이창동 감독은 한국영화계에서 조금은 이례적인 존재다. 1980년대에 주목 받던 소설가 중 한 명이었던 그는 1990년대에 충무로로 건너왔고, 마흔 살이 넘은 나이에 영화감독이 되었으며, 참여정부 시절엔 ‘관료’ 생활을 경험하기도 했다. 문화관광부 장관까지 지낸 그는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현장으로 돌아왔다. 이런 이력들만으로도 충분히 이례적이지만 1980년대에 시작된 이른바 ‘한국영화 뉴웨이브’가 서서히 잦아들고 충무로가 서서히 산업화를 가속시키며 고속 성장을 이루던 시기에, 트렌드나 콘셉트와 거리를 둔 영화를 통해 대중과 소통했던 몇 안 되는 감독 가운데 그가 있다. 개인적으로 데뷔작 ‘초록물고기’를 시작으로 배우 설경구·문소리와 함께 작업한 ‘박하사탕’ ‘오아시스’까지를 1기, 여성배우들을 잇따라 주연으로 세운 ‘밀양’과 ‘시’를 2기로 보고 있는데, 이번 ‘버닝’을 통해 그는 또 다른 3기로 넘어간 것처럼 보인다.

종수로 분한 배우 유아인. 그는 ‘완득이’ ‘사도’ ‘베테랑’ 등을 통해 극과 극을 오가는 캐릭터를 거의 완벽하게 소화하며 한국영화계에서 연기파 배우로 성실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랑하는 여자를 둘러싼 미스터리를 풀고자 하는 순수하고도 예민한 주인공으로 파워풀하고 안정적인 연기로 극의 중심을 이끈다. 특히 컷을 외친 후에도 캐릭터의 감정에 완전히 몰입한 놀라운 집중력은 현장에 있는 이들을 경탄하게 만들었다는 후문도 들린다. 이렇게 그는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인물로 설득력 있게 그려내며 이창동 감독의 신작에 안착한다.

벤으로 분한 배우 스티븐 연. 국내 관객들에겐 봉준호 감독의 ‘옥자’로 이름을 알린 그는 미국의 인기 드라마 ‘워킹 데드’ 시리즈에 잇따라 출연하며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다. 미스터리한 면모를 지닌 캐릭터에 특유의 유머러스함과 지적인 매력을 더한 그는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은 매력을 지닌 정체불명의 남자 벤 캐릭터를 완성했다. 그는 “평소 이창동 감독의 열정적인 팬이었다.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나에게 필요한 역할이라는 생각에 바로 출연을 결심했다”고 출연하게 된 계기를 밝히며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다. 지금까지 없던 캐릭터에 도전한 그의 노력과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이 충분히 느껴진다.

해미로 분한 배우 전종서. 캐스팅 단계부터 화제를 모았던 그녀는 이창동 감독이 오디션을 통해 발굴해 낸 신예로 이번에 유아인, 스티븐 연과 매력적인 앙상블을 이뤘다. 출중한 선배 배우들 사이에서도 지지 않는 아우라와 자유분방하고 넘치는 연기력을 선보인 그녀는 올해 한국영화계의 놀라운 발견으로 기억될 것이다. ‘버닝’의 흥행과는 무관하게 충무로를 대표하는 여성배우에 곧 이름을 올릴 것이 분명해 보인다.

잘 알려진 것처럼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반딧불이’에 수록된 단편소설 ‘헛간을 태우다’가 ‘버닝’의 원작이다. 원작이 여자의 사라짐에서 끝맺는 것과 달리 영화는 몇 걸음 더 나아가 미스터리의 끝을 향해 돌진한다. ‘버닝’이 흥미로웠던 지점은, 굳이 장르로 보자면 미스터리일 것이나 기존 미스터리물이 미스터리를 해결하면서 마무리되는 것과 다르게 더 큰 미스터리를 관객에게 안기면서 끝난다는 점이다. 이와 비슷한 현상을 ‘곡성’에서도 본 듯하다. 그래서일까. 영화의 흥행을 이끄는 동력까지는 아니지만 ‘버닝’의 ‘N차 관람’이 이어지고 있다니. 장정일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두 번 본 것”만이 영화라고, 한 번 보고 만 것은 영화가 아니라고, 그건 길거리에서 우연하게 목격하게 된 교통사고와 같은 거라고. 그렇다면 교통사고 같은 영화들이 지금-여기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우리 때는 현실적으로는 힘들었지만 희망이 있었다. 독재 정권을 어떻게 하면 될 거라는 추상적인 희망도 있었지만 물질적으로도 내가 지금은 어렵지만 앞으로는 점점 잘살게 될 거라는 분명한 희망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게 없다. 이건 능력과 상관없고 본인의 노력과도 상관없이 벌어지는 현상이다. 개인은 점점 더 왜소해지고 개인의 삶은 초라해지고 있는데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인다. 이런 현실을 우리가 알기 쉬운 서사로 쉽게 감동할 만한 이야기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위로나 힘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해결이 안 되는 문제 아니냐. 그래서 오히려 질문을 하고 싶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만든 소중한 영화를 이렇게 흘려보내야 하다니. 매년 칸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영화 중 각국 평론가들로부터 가장 뛰어난 평가를 받은 작품에 수여되는 상인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버닝’은 수상했다. 죄 없는 마블 영화들이 더 미워 보인다. ‘버닝’은 지금보다 훨씬 나은 대접을 받을 충분한 권리가 있다. 또 몇 년이 흘러야 이창동 감독의 신작을 볼 수 있을는지. 그 시간이 8년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독립영화감독, 물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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