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두렁 새참의 추억 보리밥·나물반찬…영천장 곰탕거리·돔배기 1번지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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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01   |  발행일 2018-06-01 제34면   |  수정 2018-06-01
[이춘호 기자의 푸드로드] ■ 영천
보현자연수련원 조정숙 원장 ‘들밥’
돌나물 물김치·고사리·더덕 장아찌…
품앗이·두레밥상, 싸리광주리에 한상
잡어에 메기 섞어 끓인 돌메기매운탕
영천공설시장 포진한 돔배기와 곰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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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보현자연수련원 조정숙 원장은 매년 이맘때면 ‘두레밥상’을 추억하기 위해 ‘영천들밥’을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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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장 곰탕거리에는 대를 이은 해묵은 집이 많다. 이미 썰어놓은 고기를 토렴해서 덥히고 있는 아줌마의 손길도 맛의 한 원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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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장 돔배기 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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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역화 작업이 끝난 임고서원. 포은이 시묘살이했던 여막과 포은이 격살됐던 개성 선죽교까지 재현해 놓았다(위). 화북면 자천리 오리장림.

대구~포항고속도로 북영천 IC. 거기로 빠져나와 35번국도를 타고 청송 쪽으로 간다. 고현천 바로 옆에 자릴 잡은 35년 역사의 ‘돌메기매운탕’집. 주인 조수현씨는 강원안동권, 강원도권 등지로 잡어를 잡으러 다닌다. 영천 물량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돌 사이에 사는 피라미 등 잡어에 메기를 섞어 끓이는 게 이 집만의 특미. 술통으로 만든 장승 같은 간판, 그리고 1988년식 빨간 중고 포니승용차가 얘깃거리가 되고 있다. 약간 괴짜 스타일의 매운탕집이다.

보현자연수련원 조정숙 원장 ‘들밥’
돌나물 물김치·고사리·더덕 장아찌…
품앗이·두레밥상, 싸리광주리에 한상
잡어에 메기 섞어 끓인 돌메기매운탕
영천공설시장 포진한 돔배기와 곰탕

가볼만한 곳
6년간 부모님 ‘시묘살이’ 포은 정몽주
임고서원 부근 짚으로 엮은 여막 지어
은해사 불광각 추사 편액, 최고의 대작
비틀어짐 끝판미학 왕버들 ‘오리장림’
예술가 거주하면서 작업 별별미술마을


◆6월의 영천들밥댁

5~6월. 보리누름철이다. 보리와 벼가 ‘바통터치’ 하는 시점이다. 농촌은 더없이 분주해지고…. 예전에는 식당은 언감생심. 논두렁밭두렁에 퍼질러 앉아 ‘새참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그 속에 한민족의 품앗이와 두레정신이 숨어 있다. 그런데 이젠 다들 ‘배달음식’에 길들여져만 간다. 새참을 만들어 줄 사람이 없는 탓이다. 다들 대처로 나가버렸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어쩔 수 없이 식당에 전화 건다. 짜장면, 프라이드치킨 등 주문만 하면 무슨 메뉴라도 재깍 배달해준단다.

보현산천문대로 진입하는 옥계삼거리. 천문대 방향으로 우회전했다. 화북면 횡계리의 횡계(橫溪)에 설정된 ‘횡계구곡’이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풀려나간다. 17세기 조선시대 학자인 정만양·규양 형제가 풍경을 차경(借景)해서 원림(園林) 형태로 만든 것이다. 성리학의 종조인 주자(朱子)는 복건성 무이산 무이구곡 제5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무이구곡가’를 지었는데 이들 형제도 이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11㎞를 지나자 왼쪽에 수련원이 보인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 차를 세웠다. 화북면 정각리 ‘별빛마을’ 바로 옆에 있는 자양면 보현리 보현자연수련원 조정숙 원장. 들밥 준비를 하고 있던 조 원장이 부엌에서 나와 멀리서 행주를 흔든다. ‘들밥아지매’ ‘보현댁’ 등으로 불리는 그녀가 배달 대목에서 한숨을 내쉰다. 그래서 매년 이 무렵 보란 듯이 ‘들밥댁’으로 변신한단다. 누가 시킨 게 아니고 자청한 것.

미세먼지가 있는 날이었는데 여기서만은 그 먼지가 실종된 것 같다. 산자수명해서 풍광의 피륙 낱낱이 또렷하게 만져진다. 느티나무 옆 살평상에는 두꺼운 그늘이 방석처럼 깔려 있다. ‘별유천지비인간’의 형국이라면 오버일까.

등이 휘청거리는 지난 20년간의 수련원 개발사. 듣는 사람도 애가 탄다. 안동에서 태어난 그녀는 청소년문화운동가였다. ‘우리땅 제철음식을 잘 먹여야만 아이들의 미래가 밝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농사도 짓고 보리밥도 먹어보고 반딧불이 보면서 잠을 청하고, 심야에 별빛 보며 산책도 할 수 있게 했다. 오감만족의 쉼터. 그게 이 수련원인 모양이다.

자양중은 1998년 폐교된다. 99년 그녀가 이 교정을 품었다. 그리고 그녀는 기꺼이 보현마을의 ‘호미’가 될 각오를 했다.

여기는 금호강 맨 상류. 근처에 천문대가 있을 정도로 1급 풍치 구역. 그래서 여기로 귀농귀촌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다. 수련원 뒤는 ‘작은 보현산’으로 불리는 수석봉, 마을 앞은 보현천이 흐른다. 그 너머 기룡산이 마주보고 있다. 잔디를 심고 숙소 용도의 귀틀집도 지었다. 모형스타일의 첨성대도 만들었다. 그런데 최근 그 상단에 글램핑장이 들어섰다. 인근에도 적잖은 캠핑장을 겸한 펜션이 들어섰다. 수련원도 환경파괴란 화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보현리가 고향인 가호댁과 범절 깍듯하고 솜씨 절정인 찬모가 조 원장과 함께 들밥을 차린다. 수련원 텃밭에는 웬만한 채소류가 총출동해 있다. 조 원장이 해묵은 갈치김치를 먹어보라고 김치통을 내민다. 묵은지가 물컹거리지 않는다. 젓갈 관리를 잘 했다는 증거다.

들밥이 완성됐다. 돌나물로 만든 물김치가 날렵한 미각을 유지하고 있다. 찹쌀풀을 사용했는데 맑고 새콤한 국물맛에 한약재 향이 감돈다. 모처럼 싸리광주리를 본다. 그 복판엔 식기 구실을 하는 큰 조롱박이 자릴 잡았다. 그 주위로 자잘한 박이 자식처럼 오종종하게 둘러 앉았다. 풋고추 3개, 된장, 고사리, 삼색전, 더덕장아찌, 취나물, 무·표고버섯·우엉채, 김치가 방긋 웃는다. 그녀는 요즘 식재료 연구에 기력을 집중한다. 다들 음식에 매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2013년 숨은 솜씨를 발휘할 기회가 왔다. 서울 양재동 소재 aT센터 전시장에서 열린 제6회 경북식품박람회. 이때 ‘영천밥상’을 선보였다. 돔배기로 산적·구이·지짐을 만들었다. 산삼배양근으로는 팔보채와 비빔나물을 만들었다. 영천 지역의 우수농산물인 화남면 용계리의 매실, 임고면의 살구, 보현산의 가죽나물, 곤달비·더덕으로 장아찌를 만들었다. 그리고 양반가의 대표음식인 황태포, 황태찜 등도 보탰다. 한방김치와 장아찌류로 만든 ‘조정숙한방김치’는 특허청에 상표 등록이 됐고 덕분에 ‘김치아지매’로 알려진다. 급기야 지난해 그녀는 경북식품박람회 때 들밥을 전격적으로 전시했다.

“너무 혼밥에 매몰되고 있어요. 밥상머리 교육도 퇴조하는 것 같고…. 향후 젊은 친구들을 위해 ‘들밥번개’를 자주 마련해 볼 작정입니다. 일반 개량밥공기과 달리 말린 조롱박은 식기로 딱인 것 같아요. 습기를 잘 조절해줘 철제 밥그릇에 비해 하절기 음식이 덜 상하죠.”

수련원은 서관을 식당으로 활용해 예약받은 사람에 한해 한끼 1만원짜리 들밥을 대중화할 예정이다.

◆사이에 숨은 풍경 이야기

팔공산에는 2개의 조계종 본사가 있다. 동화사와 은해사이다. 한 산에 두 개 본사가 있는 곳은 팔공산뿐이다. 합천 해인사로 접어드는 솔숲도 유명하지만 은해사도 그 못지않다. 은해(銀海)는 ‘안개’를 의미한다. 일주문에서 보화루까지 약 500m. 숙종 때부터 소나무숲을 조성해 왔다. 2007~2008년 추가로 2천여주의 금강송을 식재했다. 이 숲을 일러 ‘일체의 생명을 살생하지 않았다’ 해서 ‘금포정(禁捕町)’이란다. 특히 사찰여행가 사이에 주목을 받는 사찰은 일년에 단 하루, 사월초파일에만 문을 여는 비구니 도량 ‘백흥암’. 그 절밥도 얻어먹기 힘들다.

은해사 소나무의 구부러짐. 그걸 예사롭지 않게 본 추사가 은해사에 적잖은 작품을 전했다. 그래서 은해사가 추사체 야외 전시장으로 불린다. 1848년 추사가 제주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1851년 북청 유배길에 오르기 전에 쓰인 작품. 그 중에서도 은해사성보박물관에 소장된 ‘불광(佛光)’ 편액이 압권이다. 대표적 수작이다. 전해지는 이야기다. 당시 은해사 주지는 새로 지은 건물의 ‘불광각’ 편액 글씨를 추사에게 특별히 부탁했다. 그런데 독촉해도 써주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 선물로 불상을 내밀며 간청했다. 추사가 크게 웃었다. 주지가 글씨를 나무에 판각하려니 갈등이 생겼다. ‘불(佛)’ 자의 세로 획이 유별나게 길었다. 고민 끝에 불 자의 긴 획을 광 자에 맞춰 잘라 버린 채 편액을 만들었다. 추사는 아무 말 없이 편액을 떼어 오게 해 절 마당에서 불태워 버렸다. 주지는 용서를 빌고 다시 원본 글씨대로 판각해서 불광각에 걸었다. 불광 글씨는 가로 1.55m 세로 1.35m. 현존하는 추사의 작품 중 최고 대작이다.

◆오리장림과 미술마을

팔공산 묘봉암 뒷산에서 내려다보는 은해사의 암자 ‘중암암’ 경관도 한 폭의 그림이다. 국보 제14호 거조암 영산전에 있는 흙으로 빚은 소박한 오백 나한상 역시 훌륭한 불교미학이 아닐 수 없다.

솔숲도 오래 보면 좀 질린다. 시선을 좀 유순하게 주물러 줄 필요가 있다. 좀 순한 숲이 필요하다. 보현자연수련원 가는 국도변에 있는 화북면 자천리 ‘오리장림(五里長林)’의 그늘이 딱이다. ‘2㎞에 걸쳐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다. 35번 국도가 개설되면서 숲이 좌우로 갈라지고 사라호 태풍 등으로 많은 부분이 유실돼 지금은 마을 앞 군락지 등 몇 곳에서만 옛 향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은행나무, 왕버들, 굴참나무, 시무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풍게나무, 회화나무, 말채나무, 소나무, 곰솔, 개잎갈나무 등이 모여 있지만 역시 비틀어짐의 끝판 미학을 보여주는 왕버들이 강추.

화산면 가상리 일대에 가면 그림이 된 동네를 볼 수 있다. 그 이름은 ‘별별미술마을’. 가상리를 중심으로 화산 1, 2리, 그리고 귀호리까지 엮은 미술마을 프로젝트 때문에 탄생됐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쉰 명 남짓한 예술가들이 거주하면서 미술 작업을 벌였다. 안동권씨, 영천이씨, 창녕조씨, 평산신씨, 청주양씨가 모여 산다. 평범한 시골 마을이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변신한 것은 2011년 마을 미술 프로젝트에 선정되면서부터. 4개의 마을이 하나의 지붕 없는 미술관이 된 셈이다. ‘신몽유도원도―다섯 갈래 행복길’이라는 주제로 조각과 그림, 디자인, 사진 등 모두 62점이 반짝반짝 빛난다. 수십 년간 비워둔 빈집이 그 자체로 인상적인 오브제가 됐다. 경로당 벽에는 마을 주민들의 손도장이 별자리처럼 찍혔다. 이 마을이 더욱 힘을 받은 건 2004년 폐교된 자리에 들어선 가상리의 ‘시안미술관’ 때문.

저녁이 오고 있다. 시장기도 함께 밀려온다. 어둑한 영천공설시장에 포진한 돔배기와 곰탕거리.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주인들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영천은 자타가 공인하는 전국 최고의 ‘돔배기 유통1번지’.

돔배기와 짝이 되는 선비의 고기는 ‘문어’다. 돔배기에는 경상도 선비의 제사문화, 그리고 그 속에 송진처럼 선비의 밥상이 박혀 숨어 있다. 포은은 훗날 영천이 돔배기 고향이 될 줄 알았던지 돔배기만큼이나 독특한 생선 눈알을 퍽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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