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칼럼] ‘꼴찌가 일등 되고’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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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01   |  발행일 2018-06-01 제23면   |  수정 2018-06-01
[조정래 칼럼] ‘꼴찌가 일등 되고’
논설실장

‘한 방향으로 달리기를 하다가 갑자기 뒤로 돌아서 뛰게 하면 어떻게 될까.’ ‘일등이 꼴찌되고, 꼴찌가 일등된다.’ 최근 한 방송인은 마치 수수께끼 같고 선문답 같기도 한 말을 툭 던졌다가 이렇게 답변까지 알아서 내놓는다. 방송사의 인사가 그러하다는 말인즉슨, 새 사장이 전 경영진에서 선임된 간부들을 자리에서 거의 다 쫓아내 평사원으로 돌아가게 했다는 거다. 인사학살, 과거에도 그런 일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청소하듯 싹 쓸어낸 무자비함은 전례를 찾기 힘들다는 전언이다. 업무 특성상 서열을 무시하거나 중요시하지 않는 조직이라면 이 같은 인사는 참으로 역동적이고 민주적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고도의 전문성과 조직의 안정성이 요구되는 방송사에서 일어난 이 같은 인사 참사는 아무리 좋게 보더라도 방송장악의 완결판이다.

언론노조와 합작한 문재인정부의 방송장악 시나리오는 박진감 넘쳤고,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과 ‘보도·제작·편성의 자유 보장’이란 공약을 헌신짝처럼 폐기처분했다. ‘힘센 놈이 먹게 돼 있어요 방송은. 그게 방송의 속성이에요. 방송을 우리 흔한 말로 예쁜 여자 보고 총각들이 집적거리는 거 그거 당연한 거 아닙니까?’ 방통위 청문회를 주재하던 한 교수가 사표를 던지지 않고 버티던 이사에게 결단을 촉구하며 이렇게 다그쳤다는데, 방송장악의 본질을 이보다 더 적확하게 표현하기도 어렵겠다. 양대 공영방송은 과거 5공화국 시절 ‘땡전 뉴스’를 ‘땡문 뉴스’로 대체하고 있다는 비아냥을 사고 있다.

정권에 의한 방송장악의 폐해는 심각하지만 일반인에겐 잘 체감되지 않는다. 한국당 경북도당 선대위 발대식에서 김석기 경북도당 위원장은 “현 정권은 언론장악을 통해 우리 국민의 귀와 눈을 멀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촌철살인에 가까운 지적과 비판이지만 진정성과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당 또한 지난 정권에서 방송장악을 위한 온갖 시도를 한 전력이 있기에 그런 말 자체가 공허하게 들릴 수밖에. 정치적으로 보면 편파 방송은 인과응보고 피장파장이지만, 언론 내적으로는 치유되지 않으면 공영방송을 죽음에 이르게 할 암적 존재다. 시청자들의 외면은 뉴스 불신에 따른 시청률 저하로 이어지고, 조직은 곪아 터져 양식있는 구성원들을 등돌리게 한다. 정권에 빌붙은 경영진에 따라 줄이 형성되고 라인이 다르면 선임자에게 인사는커녕 아는 체도 않는다고 하니 공영집안이 아니라 콩가루 집안이어서 불쌍하다.

정권 획득의 전리품으로 전락한 공영방송. 바로세우기가 시급한데, 드루킹 특검과 여론조작 바로잡기보다 더 중요하다. 제도적으로는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방송법 개정안이 통과돼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이 야당일 때 발의한 법안을 여당이 됐다고 모른 체하면 그건 아니지. 방송장악의 달콤함이야 누군들 모르리. 문재인 정권이 최우선 국정 과제인 적폐청산의 진정성을 얻으려면 방송사 사장 선임권부터 내려놓아야 하지 않을까. 전부 아니면 전무의 ‘제로 섬’ 게임과 같은 승자독식의 악순환에 갇혀 있어서야 어떻게 1987년 민주화 이후의 민주를 입에 올릴 수 있나.

방송 내적으로는 정권에 줄을 대고 충성하는, 언론인이기를 포기한 폴리널리스트들이 방송함락의 내응자들이다. 정권에 방송을 송두리째 갖다 바치는 행위와 정권 실력자에게 줄을 대온 관행은 법적·제도적 시스템에 의해 봉쇄되지 않는 한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정치권력이 낙하산 투입한 방송 경영진의 위세는 무섭다. 언론을 자기 입맛대로 통폐합한 ‘신군부’ 자리에 ‘신경영진’을 가져다 놓아도 맞춤하지 않을까. 언론인이 내부의 라인이나 기준 등에 의해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다면 그건 분명 자유를 잃었거나 아니면 자유로부터 도피한 거다.

방송에 대한 불신은 야권에서 여론조작 의혹 제기는 물론 ‘가짜언론’이란 독설까지 서슴지 않는 수준이다. 방송지배구조의 중립을 담보할 방송법 개정이 드루킹 특검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다. 한국당 등 야권이 이를 관철시킬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면 시청자 국민이 나서서 집권 여당의 모르쇠를 징치할 수밖에 없다. 꼴찌가 일등 되는 방송조직 뒤집기는 전시상황에서나 가능한 점령군에 의한 쿠데타이자 공영방송의 흑역사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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