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21] 충남 계룡산 용산구곡...조선 독립 염원했던 권중면, 승천하는 龍 주제로 국권회복 노래하다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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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31 08:08  |  수정 2021-07-06 15:06  |  발행일 2018-05-31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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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곡의 중심인 5곡 황룡암 주변 풍경. 왼쪽 바위 위에 ‘5곡 황룡암’이라 새겨져 있고, 오른쪽 바위와 그 아래 암반 위에도 여러 가지 글귀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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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곡’과 ‘1곡 심룡문’이 새겨진 바위. 여기서부터 용산구곡이 시작된다.

용산구곡은 계룡산 상신계곡(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에 있는 구곡이다. 취음(翠陰) 권중면(權重冕 1856~1936)이 1932년에 설정했으며, 승천할 용을 모티브로 삼아 국권의 회복을 바라는 염원을 담아낸 것으로 해석된다. 우리나라가 국권을 상실한 이후 계룡산 상신계곡에 은거하며 용의 일생을 주제로 구곡을 설정, 기울어진 국운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일반적인 구곡과는 다른 주제를 담고 있어 특별한 흥미를 갖게 하는 사례다. 구한말 남다른 절의를 드러낸 인물인 권중면은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조정에서 여러 벼슬을 지냈다. 외직으로 황해도 평산군수를 거쳐 1907년 능주군수로 전임받았을 때 관직을 사직하고 비통에 젖어 지내다가 회갑이 되던 1916년 봄에 계룡산 자락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그는 따르는 제자들을 위해 사랑채에 서당을 차리고 망국의 서러움 속에서 두문불출하며 선비의 절개를 지켜나갔다. 국운이 되살아나길 학수고대했으나 광복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81세 되던 1936년에 별세했다. 시집 52권, 문집 14권, 기행문 1권 등 모두 67권의 저서를 남겼다. 하지만 6·25전쟁 당시 공산군이 그의 집을 3개월간 점거·사용할 때 휴지와 불쏘시개로 사용해 모두 없어지고, 기행문인 ‘금강산 유람기’ 한 권만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권중면은 친형인 권중현(1854~1934)이 1905년 을사조약에 서명하자 형제의 의를 끊고, 관직 유지와 사퇴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가 1907년 정미칠조약을 계기로 벼슬을 내려놓고 계룡산 상신리에 은거하며 1932년 8월 용산구곡을 설정하고 말년을 보내다가 삶을 마감했다. 권중현(농상부대신)은 박제순(외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이완용(학부대신)과 함께 을사오적에 속하는 인물이다. 친형제이지만 생각과 가치관이 너무나 달랐던 모양이다. 권중면의 아들은 우리나라 단학(丹學)의 대가로, 민족운동가이자 단군사상가로 평가받는 봉우(鳳宇) 권태훈(1900~1994)이다. 

구한말 선비 절개지킨 권중면
을사오적 지탄 친형과도 의절
관직 내놓고 상신계곡에 은거
‘龍의 일생’ 관련지어 9곡 설정
광복 끝내 못보고 1936년 별세

◆용을 주제로 설정한 용산구곡

용산구곡은 구곡의 설정 주제를 용으로 삼은 점이 특징이다. 용이 숨어있다가 승천할 때까지 이야기 전개를 통해 국권을 강탈당한 조선인의 국권회복 의지와 염원을 자연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이루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계룡산 상신계곡에 은거해 수도하던 용이 비로소 때를 만나 여의주를 물고 승천함을 조국이 독립하고 번영하는 것으로 상징화시켜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1곡은 용을 찾는 문인 심룡문(尋龍門), 2곡은 용이 숨어 있는 못인 은룡담(隱龍潭), 3곡은 용이 수련하는 곳인 와룡강(臥龍岡), 4곡은 용이 수련하다 쉬면서 노니는 곳인 유룡대(遊龍臺), 5곡은 용이 공부가 무르익어 여의주를 얻는 바위인 황룡암(黃龍岩), 6곡은 용이 세상 이치를 보는 능력을 얻어 모습을 나타내는 현룡소(見龍沼), 7곡은 용이 구름을 만나 하늘로 오를 준비를 하는 못인 운룡택(雲龍澤), 8곡은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곳인 비룡추(飛龍湫), 9곡은 용이 승천해 신이 된 못인 신룡연(神龍淵)으로 구곡의 위치와 명칭을 정했다. ‘용’자가 다 들어가 있고, 마지막 자를 모두 다르게 한 것이 특징이다.

이 용산구곡은 상신리 마을 입구 계곡에서 시작해 계곡 상류로 거슬러 오르며 큰골까지 이르는 2.5㎞ 정도 되는 계곡을 따라 설정돼 있다. 마을 옆을 지나 3곡부터 펼쳐지는 상신계곡의 5월 풍광은 맑은 물이 적당히 흐르는 깨끗한 암반 계곡인 데다 활엽수 숲이 뒤덮여 있어 용이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려하다.

1곡 심룡문은 마을 입구의 길 옆 계곡인데, 계곡 따라 난 도로 옆 큰 바위에 ‘1곡 심룡문’이 새겨져 있다. ‘용산구곡(龍山九曲)’이라는 글씨도 같이 새겨져 있다. 한자로 된 이 글씨들은 권중면의 글씨로 보인다. ‘일곡’은 예서 형태로, ‘심룡문’은 초서로 되어있다. 9곡 신룡연까지 모두 같은 형식으로 되어있다. 이 바위 뒤편에는 ‘개학동문(開學洞門)’과 ‘상신소(上莘沼)’라고 새겨져 있다. 바위 아래 계곡에는 ‘취음동천(翠陰洞天)’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

2곡 은룡담은 상신리 당간지주가 있는 곳을 지나 계곡 따라 조금 올라가면 나오는데, 계곡 바닥 바위에 ‘2곡 은룡담’이라 새겨져 있다.

3곡부터는 숲과 바위, 맑은 물이 어우러지는 수려한 계곡이 이어진다. 3곡 와룡강은 계곡물이 흐르는 암반과 소가 있는 곳이다. 바위 우측 상단에는 ‘자양산월동원만천 백록담파영방사해(紫陽山月同圓萬川 白鹿潭波盈放四海 : 자양산에 뜬 달 모든 시내 비추고, 백록담 물은 넘쳐 사해로 흐르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와룡강 조금 위에 있는 4곡 유룡대는 커다란 너럭바위다. 이 바위에는 다양한 글귀들도 새겨져 있다. ‘4곡 유룡대’를 비롯해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 ‘강산풍월 한자주인(江山風月 閑者主人)’ ‘자양시(紫陽詩)’ ‘취음서(翠陰書)’ ‘권태훈(權泰勳)’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거연아천석’은 멋진 풍광과 더불어 평안하게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한다. 주자의 ‘정사(精舍)’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거문고 타며 공부한 지 40년(琴書四十年)/ 나도 모르게 산중 사람 다 되었네(幾作山中客)/ 띠집 짓는데 하루면 족하니(一日茅棟成)/ 문득 나와 샘과 돌이 한 몸이네(居然我泉石)’.

◆용산구곡 중심은 5곡 황룡암

5곡 황룡암은 용산구곡의 중심이며,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오방색 중 황색은 중앙을 상징하듯이 황룡을 구곡의 중심인 오곡에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넓은 암반 위에 큰 바위가 계곡 양 옆에 마주 보며 서 있다. 그중 큰 바위에 ‘5곡 황룡암’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암반 위에는 ‘태극암(太極岩)’ ‘궁산을수(弓山乙水)’ 등 다양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궁산을수는 산태극·수태극의 지형을 상징한다. 풍수지리에서 산줄기와 물줄기가 어우러져 둥그스름하게 굽이쳐 태극모양을 이루는 계룡산 지세를 표현하고 있다. 이곳에는 ‘취음 권중면 임신팔월(翠陰 權重冕 壬申八月)’이라는 각자도 있다. 1932년 8월(음력)에 권중면이 새긴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6곡 현룡소는 제법 큰 못이다. 못 위 바위에 곡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어지는 7곡 운룡택과 8곡 비룡추는 각자가 많이 마멸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마지막 9곡 신룡연은 큰 바위 앞의 작은 못이다. 바위 아랫부분에 ‘신룡연 9곡’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 ‘구룡조천(九龍朝天)’이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구룡조천과 관련해 권중면의 아들 권태훈이 남긴 글이 있다.

‘나의 선고께서 계룡산의 신야(莘野)에 들어오신지 이십일년만에 하세(下世)하시었다. 이 동천(洞川)에 구곡을 설(設)하시고 동구(洞口)에 각 왈 신야춘추(莘野春秋) 도원일월(挑源日月)이라 하여 말년의 은둔(隱遁)을 표(標)하시었다. 구곡에 곡곡(曲曲)을 용(龍)자로 명명하시고 구곡에 구룡조천(九龍朝天)이라 하시어 도학(道學)의 성공을 일방(一方)으로 의미하시었는데, 선고 향수(享壽) 팔십일세이니 용은 양구(陽九)요 구룡이 조천하면 구구팔십일수(九九八十一數)에 조천하신다는 예기(豫期)도 된다.’ 1952년 3월23일의 기록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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