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구로에서] 명문대 합격 현수막 유감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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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30   |  발행일 2018-05-30 제30면   |  수정 2018-05-30
학교 학생소질 개발하는 곳
성적으로 우열 가려선 안돼
명문대 합격 현수막은 천박
이젠 교육민주화 일환으로
교육감이 부착 금지해주길
[동대구로에서] 명문대 합격 현수막 유감

내 일이 아니다 싶어 다들 수수방관한다. 그게 소시민들의 삶. 특히 ‘일상·관행’이란 딱지가 붙어 있으면 그 문제는 더더욱 사각지대로 숨어버린다. ‘집단의 악’은 쉬 선으로 얼렁뚱땅 둔갑된다. 또 목구멍(식솔)이 가장의 진실을 쉬 가려버린다. 가장은 진실을 알아도 혼자 가슴에 품고 간다. 그래서 세상은 좀처럼 안 바뀐다.

일본한테 나라를 뺏겼어도 조선에는 사약을 각오한 선비가 적잖았다. 심산 김창숙, 우당 이회영, 석주 이상룡 등 한말 몇몇 선비는 자기 가문을 파묻고 독립운동에 올인했다. ‘명문대 입학=성공’, 그런 출세욕으로는 불가능한 경지다. 사리사욕에 찌든 권세지향의 양반과 도리·명분을 사수했던 선비는 천양지차. 명문대 출신이 갈수록 ‘양반족’으로 파멸하고 있다. 선거판도 양반족 놀이터 같다. 선비는 멸종 직전이다.

‘깨진 유리창 효과’를 아는가. 이는 ‘깨진 유리창일수록 돌을 더 던지고 싶다’는 일종의 일그러진 집단심리를 말한다. 멀쩡한 유리창에는 쉬 돌을 던지지 못한다.

괴한이 백주대낮에 누군가를 마구 폭행한다. 도와달라고 하는데 소용이 없다. 다들 안타깝다며 발만 동동 구른다. 군중은 의외로 잘 쏠리면서도 무책임하다. 그런데 폭행당하던 사람이 특정인을 지칭하며 도와달라 하면 그 시민도 조건반사적으로 ‘의로운 시민’으로 돌변한다. ‘하늘이 낸 의인’ 같은 건 기대하지 말자. 조건만 충족되면 늘 생겨날 수 있는 게 의인이다.

이 대목에서 차기 전국 교육감한테 꼭 제안하고 싶은 사안이 하나 있다. 매년 졸업 시즌 학교 정문을 수놓는 ‘명문대 합격자 현수막’. 교육감들이 합심해 ‘현수막 금지 캠페인’을 펼쳐달라는 것이다.

논리는 대충 이렇다. 공교육의 최대 가치는 공정·공평·평등한 기운을 학생의 유전자에 심어주는 것. 성적조차도 ‘참고용’일 뿐 인권 우열의 척도는 아니다. 다들 현실감 없는 얘기라고 지적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안목이 수수방관적 자세인 것이다.

졸업생은 저마다의 미발현된 가능성을 갖고 사회로 진입한다. 그런데 이 나라 학교에서는 서둘러 ‘게임 끝’ 상황이 연출된다. ‘성적폐인’으로 낙인 찍힌 제자들이 이미 학교에서부터 ‘인생폐인’으로 방치되고 있다. 이는 교육적 테러다. 국민적 재앙이다. 대한민국 교육부와 전국 교육자가 ‘석고대죄’해야 될 사안이다.

바야흐로 세상만사 성적으로 저울질하는 세상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돼버렸다. 명문대 현수막도 그 흐름을 부채질했다. 그런데 아니다. 학교만은 목숨 걸고 모든 제자를 평등한 가치로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선택한 길을 찾아가게 된다. 먼저 대학의 귀천부터 없어져야 직업의 귀천이 없어진다. 자연 갑질논쟁도 박멸된다. 그런 측면에서 명문대 현수막은 분명 ‘소탐대실용’이다.

‘박근혜게이트’로 낙마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그는 1984년 영주고를 졸업하고 그해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학교는 물론 고장의 자랑이었을 것이다. 그때 명문대 현수막을 달았다면 이제는 심히 유감의 현수막을 걸어야 하지 않겠는가. 미투 사건에 휘말린 고은의 시비를 철거하는 해프닝과 다를 바 없다.

훗날 블랙이 될지 화이트가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졸업생. 명문대 입학을 무슨 영웅이나 된 것처럼 현수막으로 알릴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건 ‘호들갑의 극치’고 한국 교육의 천박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방탄소년단의 앨범 ‘LOVE YOURSELF 轉 TEAR’가 미국 ‘빌보드 200’ 1위에 등극했다. 한국 가수 최초다. 문재인 대통령도 축전을 보냈다. 멤버들의 고교 성적이 뭐 그렇게 좋았겠는가. 이제 성적불패신화가 허물어지고 있다. 공부 못해도 다른 특기로 우뚝 설 수 있는 세상이다. 모든 제자가 ‘나라의 꽃(國花)’이 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명문대 현수막부터 거부하자. 모두 기립박수를 칠 것이다. 아무나 할 수 있어 보여도 아무나 할 수 없는 결정. 교육감이 솔선수범하길 기대해본다.

이춘호 주말섹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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