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적과의 동침

  • 원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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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23   |  발행일 2018-05-23 제31면   |  수정 2018-05-23

‘적(敵)과의 동침(Sleeping with the enemy)’, 20세기 폭스사가 1991년 만든 영화 제목이다. 줄리아 로버츠가 여주인공 로라 역을 맡아 가정 폭력의 폐해와 복수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연출했다. 돈 많은 미남에다 자신을 공주처럼 떠받들던 마틴은 결혼을 해보니 끔찍한 인간이었다. 정리정돈 결백증에다 의처증까지 지녔고,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로 정돈이 안돼 있을 경우 아내를 무자비하게 폭행한다. 왕자님이 아니라 함께 살면 안되는 악마였던 것이다. 결국 로라는 적과의 괴로운 동침(同寢)을 거부하고 자신이 바다에 익사한 것처럼 꾸며 탈출한다. 로라는 사라라는 이름으로 다른 곳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생존을 눈치챈 남편은 로라를 찾아내 다시 접근한다. 그 흉악한 적은 자신의 총을 빼앗은 로라로부터 마지막 일격을 당하는 것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녀는 적을 향한 총의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경찰에 전화를 걸어 “방금 침입자를 죽였다”고 말한다.

지난 21일은 ‘부부의 날’이었다. 부부, 자녀, 조손의 가족 관계에 대해 세간에 떠도는 그럴듯한 해석이 있다. 남편과 아내, 즉 부부는 전생에 원수지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물주가 그 원한을 풀어보라고 부부의 연을 맺게 해 줬단다. 그런데 서로 배려하며 살아야 되는데 원수처럼 싸우고 이혼하는 게 인간의 속성이다. 또한 부부가 낳아 기르는 자녀들은 전생에 채무관계를 진 빚쟁이라고 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돈을 달라고 하고 손을 벌린다고 한다. 반면, 할아버지·할머니와 손자·손녀는 전생에 연인 사이였다고 한다. 그러니 조손 간은 언제 어디서 만나도 무조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웃자고 지어낸 얘기겠지만 나름 의미가 없지 않다. 아내가 남편의 전화번호를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하면서 많이 동원한 단어가 ‘웬수’였다나. ‘여성은 원수가 될 남자를 사랑한다’는 격언도 있다. 틈만 나면 사고를 치는 남편인데 그래도 꾹 눌러 참고 살아주는 게 이 땅의 거룩한 현모양처들이다.

인생살이에서 적과의 동침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직장이든 가정이든 주변에는 적들이 널려 있다. 평소에는 친구이자 조력자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나에게 총구를 들이댈 적이다. 하지만 내공 깊은 고수들은 잘 관리하며 더불어 산다. 원도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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