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갑질에 대한 단상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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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17   |  발행일 2018-05-17 제31면   |  수정 2018-05-17
[영남타워] 갑질에 대한 단상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 가족의 ‘갑질’ 이야기는 한국사회의 오래된 병폐 중 하나를 국가적인 의제로 만들었다는데 의미를 가진다. 물론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한국사회의 ‘갑질’문화를 제대로 다루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당장 현실엔 상징성과 파급력이 없는 작은 조직에서 일어나는 상상초월의 갑질부터, 문제의식 없이 넘어가는 사소한 갑질까지 널려있다. 다퉈봤자 ‘을’이 피해를 입는, 그래서 ‘똥 밟은’이나 ‘미친 개에게 물린’ 정도로 취급해야 속편한 갑질들 말이다.

예를 들면 편의점 주인이 물건을 하나 숨겨놓고 아르바이트생에게 가게를 맡긴다. 아르바이트생은 물건 수량을 점검하다가 하나가 없어진 것을 알고 주인에게 연락을 한다. 주인의 대답은 “응, 내가 일부러 숨겨놓았어. 네가 재고 파악 잘하나 시험해 보려고”였다. 이 모욕적이고 폭력적인 일상의 태도에 정색을 하고 따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언어나 행동 차원에서 직접적인 폭력을 동원한 갑질이 평범한 일상이 되어 있는 현실이 그런 행동들을 상대적으로 하찮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한국사회의 여러 ‘적폐’들은 우리 일상의 작은 정의감이나 인권 감수성마저 마비시킨다. 거대 적폐들, 거악들이 반드시 사라져야 할 이유다. 시인 김수영이 슬프게 자괴감을 고백하지 않았던가. 왜 ‘왕궁의 음탕’ 대신에 갈비에 기름이 많다고 국밥집 주인과 다투는가라고. 그 역시 거대한 부조리가 아닌 사소한 부조리에 분노하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한국 사회는 민주화 시대를 거쳐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민주주의 성숙은 구조적 부조리들이 청산되는 모습으로 발전되어야 했고, 국력은 일상에 남은 사소한 부조리 척결에 집중해야 했다. 그렇게 되었다면 시인의 사소한 분노는 더 이상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 아닐 수 있었다. 슬프게도 그러지 못했다. 왕궁의 음탕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생활 속에서의 부조리에 대한 인식과 인간에 대한 태도는 답보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 인간의 존엄성을 절대 가치로 인정하고 이를 헌법에까지 명시하고 있음에도 권력은 자신들의 코드로 불법 사찰을 벌이고, 사적 이익을 위하여 공권력을 동원했다. 추구해야 할 가치와 지켜야 할 상식은 국가 차원에서조차 실현되지 못했다. 사적인 영역에서는 자본이 떡하니 그 중심에 자리 잡았다. 갑질은 생계를 담보로 한 폭력의 형식으로 나타났다. 김수영이 다시 태어나도 같은 시를 쓸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다양한 원인 분석과 해결책들이 여러 차원에서 제시되고 있지만, 시민 사회의 성숙으로 대표되는 각성이 없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그 각성의 단초와 가능성을 우리는 촛불을 통해 확인했다. ‘적폐’를 파헤치고 단죄하는 일련의 과정은 이 가능성을 더욱 발전시키고 확산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갑질’의 공론화 역시 같은 의미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사적 영역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은 직접적으로 개인의 삶의 질과 행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사적 영역에서의 부조리들은 사적 영역의 특성상 개인의 문제로 치환되므로 더 성숙한 의식과 연대를 필요로 한다. 다양한 ‘을’들의 움직임에 특히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이유이다.

또한 ‘갑’이나 ‘을’이나 일상적으로 드러나는 갑질에 문제 의식을 가져야 한다. 결국 성찰과 배려의 차원에서 근원적인 해결책이 제시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와도 연결되어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자각 없이는 이성복의 표현처럼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슬픈 사회가 된다.

이은경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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