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레슬러’ 유해진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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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11   |  발행일 2018-05-11 제43면   |  수정 2018-05-11
“유해진이 나오는 영화는 볼 만하다는 말 들을 수 있게 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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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진이 웃음기를 살짝 거뒀다. 이른바 ‘유해진스럽다’로 대변되는 감칠맛 나는 코믹함 대신, 홀로 아들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는 20년차 살림꾼 아빠의 부성애를 부각시켰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편안해 보인다. ‘레슬러’에서 유해진은 전직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에서 이제는 레슬러 아들 성웅(김민재)이 금메달리스트가 되는 것이 유일한 꿈인 귀보를 연기했다. 매 작품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소시민 캐릭터로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유해진에겐 맞춤옷 같은 역할이다. “시나리오를 읽고 참 건강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성장하는 스토리가 좋았다.” 영화는 그런 귀보가 예기치 않은 상황과 엮이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유쾌한 터치로 담아낸다. 표정 하나로, 대사 한마디로 대중에게 환한 웃음을 선사했던 유해진 특유의 유머는 줄었지만, 그가 지닌 편안함과 유머러스함은 더 깊은 감동과 위트로 승화됐다. 역시나 대체 불가한 존재감이다. 늘 꾸준히 연기하며 자신을 탐문해가는 유해진은 그렇게 유쾌한 매력과 친근함을 더한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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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보 캐릭터는 그간 소시민적인 모습에서 도드라졌던 당신의 역량과 매력을 좀더 극대화시킨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장성한 아들을 둔 아빠라는 점에서도 전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듯한데.

“의미가 좀 남다르긴 했다. 일단 이렇게 큰 아들을 둔 아빠 역할은 처음이라 나도 자연스럽게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반성의 시간도 많이 가졌는데, 나도 귀보처럼 늘 걱정거리를 안기는 아들이었다. 극 중에서처럼 부모님에게 마음의 상처가 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한 적이 많아서 촬영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머니 역할로 나오는 나문희 선생님이 ‘넌 자식 키우기 쉽지 않은 지 20년 됐지? 난 40년 됐어’라는 대사가 그래서 정말 마음에 와닿았다.”

▶레슬링을 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는데 준비과정은 어땠나.

“솔직히 기본기만 배우는데도 엄청 힘들었다. 나름 트레킹과 자전거로 단련된 몸이라 체력은 자신하고 있었는데 레슬링은 또 달랐다. 그나마 나는 맛보기로 잠깐 흉내만 냈지만, 현역 선수로 나오는 민재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몸을 사리지 않는 열정과 투혼을 보여줬다. 너무 열심히 해서 내가 옆에서 말릴 정도였다. 정말 나이보다 성숙하고 듬직한 친구다.”

▶요즘도 트레킹과 산악자전거를 즐기나.

“산악자전거에서 하이브리드로 바꿨다. 요즘도 촬영장에 갈 때는 자전거를 주로 이용하는데, 어제도 비를 맞으면서 탔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 동안은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진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운동하지 않아도 건강을 지킬 수 있고 사색할 수 있는 시간도 되니 정말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좋은 기운을 전해주는 것 같다.”

▶오랜기간 조연을 거쳐 이제 한 작품을 충분히 책임질 수 있을 만큼의 위치에 올라섰다. 그에 따른 책임감과 부담감이 있을 듯하다.

“물론이다. 하지만 아직 내 그릇이 크지 않아선지 그런 책임감과 부담감을 대범하게 껴안지 못한다. 내색은 못하고 그냥 속으로만 끙끙 앓는다. 난 영화를 형체가 없는 생명체라고 생각한다. 요즘처럼 규모가 큰 영화들이 나오면 그런 야생의 세계에서 얘(레슬러)가 제대로 살아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다. 그건 작품마다 느끼는 감정이기도 한데, 아무래도 내가 주연으로 출연한 작품은 걱정과 부담감이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개봉을 앞두고 있는 이 때가 그래서 늘 제일 힘들다.”


홀로 아들 뒷바라지 20년차 살림꾼 아빠役
前 국가대표 레슬러, 아들의 레슬러 꿈 지원
나도 부모님께 항상 걱정거리 안기는 자식

촬영장 이동땐 자전거 이용, 운동효과 탁월
주연작 ‘럭키’‘공조’흥행, 여태껏 운 좋아
매 작품 최선 다하지만 조심스럽고 두렵기도

흐름 매끄럽게 하는 애드리브 촬영 전 준비
캐릭터보다 재미 우선…작품선택 주저안해
열심히 사는게 삶의 목표, 자연스럽게 바빠



▶‘럭키’(697만명), ‘공조’(781만명) 등 최근 주연작들이 대박에 가까운 흥행 결과를 보여줬다. 그만큼 대중의 사랑과 신뢰를 받고 있으니 이젠 어느 정도의 기대감이나 자신감도 생길 듯 한데.

“그렇지 않은 작품도 꽤 많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모두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영화 만들기는 정말 쉽지 않다. 배우와 감독, 스태프들이 매번 의기투합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런 현실을 아니까 더 조심스럽고 두렵다. 언급한 두 작품도 솔직히 흥행을 예상하거나 기대감을 갖지 않았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95% 정도는 늘 기대보다 걱정이 앞선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애드리브 같은 대사를 유려하게 잘 구사한다. 치밀한 준비과정에서 나온 결과인가.

“극에 보탬이 될 만한 대사와 설정들을 촬영 전에 미리 준비한다. 설령 표시가 나지 않더라도 극을 보다 매끄럽게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레슬러’에서도 성웅이 데이트를 나갈 때 귀보가 ‘너 용돈있니?’라고 묻자, ‘있어’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대부분의 아빠들은 ‘잘 다녀와’라고 할텐데 귀보는 ‘그럼 나 좀 주고 가라’고 말한다. 위트 섞인 그 대화를 통해 관객들은 마치 형과 동생같은 두 사람의 부자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후반부에 전개될 이야기를 좀더 풍성하게 만들고 감동을 증폭시키는 기제로 활용될 수 있다. 매번 이 같은 작업을 준비하는 게 쉽지는 않지만 재밌어서 계속 하게 된다.”

▶그간 다양한 장르의 캐릭터를 통해 유해진다운 모습을 보여줬지만, 간혹 실험적인 작품도 눈에 띄었다. 작품 선택의 기준은 뭔가.

“‘유해진은 역시 이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는 영화만 할 수는 없다.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이상 이것저것 다 경험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나와 어울리지 않는 작품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유해진이 이런 것도 할 줄 아네’라고 생각하는 관객도 분명 있을 것이다. 김치찌개를 잘 만든다고 매일 김치찌개만 끓이면 먹는 사람은 물론이고 만드는 사람도 질리고 지칠 수밖에 없다. 간혹 내 선택을 주저하게 만드는 영화라도 재밌게 읽었다면 피하지 않는다. 내가 맡을 캐릭터보다 이야기의 재미가 우선이다. ‘1987’의 경우처럼 의미가 있는 작품도 마찬가지다. 대중이 다소 실망을 하더라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는 작품이라면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연기 경력만 30년 가까이 됐다. 이제 연기로도 자유와 여유로움이 느껴질 것 같은데.

“그게 참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 가끔 동료들과 술 한잔 기울일 때 물어보면 다들 ‘힘들다’는 얘기뿐이다. ‘이제는 할 만해’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만약 기술을 요하는 직종이라면 연륜이 쌓이는 만큼 여유로움을 찾을 수 있겠지만 배우는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는 직업인 것 같다. 비슷한 소재와 이야기라도 똑같은 작품이 아니듯 이를 대하는 배우 역시 늘 새로운 마음 가짐으로 임하게 된다.”

▶고2때 극단에 입문했을 만큼 연기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중학교 2학년때 고(故) 추송웅 선생님의 모노 드라마를 보게 됐다. 신기하게도 그 큰 극장 안에서 그 분의 모습만 보였다. ‘내가 왜 이렇게 몰입이 될까. 내가 하고 싶은 게 연기일까’라는 생각이 계속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연기자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배우라면 잘 생겨야 하는 게 기본인데 내가 그런 결정을 내렸으니 대단한 용기 아닌가.”(웃음)

▶삶의 목표도 분명할 것 같다.

“굳이 말한다면 내 삶의 목표는 열심히 사는 거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바쁘게 살게 되더라. 빅터 프랭클이 쓴 책에 나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다’라는 문장을 되게 좋아한다. 여러 의미가 담겨 있는데 최소한 삶에 대한 희망과 선한 의지는 잃지 말라고 강조한다. 나 역시 삶에 충실하기 위해 열심히, 그리고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

▶차기작이 두 편이다.

“얼마 전 촬영이 끝난 ‘완벽한 타인’과 ‘말모이’다. 내가 변호사로 출연한 ‘완벽한 타인’은 휴대폰을 올려놓고 모든 걸 공유하는 게임이 시작되면서 내 옆 사람의 비밀이 밝혀진다는 이야기다. 또 ‘말모이’는 일제시대 조선어 사전 편찬을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비밀리에 조선말을 수집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인데 한창 촬영 중에 있다.”

▶당신이 보여주고 싶은 연기는 무엇인가.

“솔직히 그런 건 없다. 특정한 연기를 보여주기보다는 ‘유해진이 나오는 영화는 늘 볼 만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대중의 신뢰를 쌓아야 한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분에 넘칠 정도의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 기대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초심을 잃지 않고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내가 대단한 배우도 아니고, 작품마다 확확 바뀌거나 변신을 거듭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에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자꾸 나를 들볶아야겠지.”(웃음)

글=윤용섭기자 hhhhama21@nate.com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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