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칼럼] 오늘이 마지막 날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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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11   |  발행일 2018-05-11 제23면   |  수정 2018-05-11
[조정래 칼럼] 오늘이 마지막 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힘이 없고 의욕마저 빠져나간 듯 너무 허약해 보였다.” 동생의 전화에 공감하며 요즘 들어 부쩍 허해진 어머니의 ‘인증 샷’을 내려받는 순간 울컥 짜증부터 솟은 건, 다름아닌 나의 무심함에 대한 자책과 질책이었다. 서울에서 정기 건강검진을 받고 시골로 내려오시는 길, 버스정류장에 선 어머니와 아들 사이 별리(別離)는 쓸쓸하기도 할 터였지만 “당장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었다”는 애잔한 동생의 목소리는 정회(情懷)를 넘어 한동안 서로 할 말을 잊게 한 나머지, 공유하는 SNS ‘대화방’에 “매주 거르는 일 없도록 돌아가며 찾아뵙도록 하자”는 문자를 올리도록 하는 게 고작이었다.

어버이의 날을 보내며 ‘어머니의 시간’을 생각해 본다. 어느 대중가요는 ‘오늘, 이 순간이 내 인생에 가장 젊은 날’이라고 노래했지만, 부모님의 시간은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른다. 100세시대라지만 여든을 넘기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는 어르신들의 푸념은 허투루 듣기에는 너무나 적확하다. 세월을 잊고 사는, 늙어본 적 없는 젊은이는 시간 개념이 없다. 세월은 누구도 비껴가는 법이 없는데 자신은 평생 늙지 않을 것처럼 살아간다. ‘나이야 가라’를 아무리 외쳐도 부모님의 오늘은 어제와 다르다. 80대는 시속 80㎞로 세월을 달린다는 게 우스개만은 아니다.

50대를 넘어 60줄에 들어선 이들은 대부분 고아다. 형제자매가 있더라도 이웃 사촌보다 못할 양이면 우린 모두 천애고아(天涯孤兒)다. 그 불편한 진실에 둔감한 채 살아갈 뿐 우린 언젠가는 모두 고아가 된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고 했다. ‘어버이 살았을 제 섬기길 다하여라. 지나간 뒤에는 애달프다 어이 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송강 정철의 깨우침은 새천년을 뛰어넘어 경북도의 ‘할매할배의 날’ 지정으로 이어졌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 할아버지·할머니를 방문하는 날은 갈수록 부박해지는 효의 가치를 되살리고 세대 간 간격을 좁혀나가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조손(祖孫) 간 격대교육의 중요성을 전국으로 널리 선양하고 있는 경북도의 고군분투가 놀랍다.

우리 선인들의 자연스러운 부모 공양도 알고보면 오랜 기간 의무를 이행하면서 시나브로 체화된 생활습관이다. 살아 생전 공경은 물론 3년 시묘살이와 같은 상제(喪祭)는 예법을 넘어 법적 강제의 산물이었다. 한줌의 사고와 하나의 실천이 쌓여 버릇이 되듯, 어른에 대한 존중심 또한 반복 실행이 결과한 굳은살일 터이다. 형식이 내용을 규제하듯 가슴에 분출하는 자발심(自發心)도 무실역행(務實力行)을 원천으로 하지 않을까 싶다.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나의 아들, 나의 어머니’는 예안이씨 종손 이준교씨(70)가 종택에서 홀로 95세 종부 어머니를 모시는 이야기로 요양원 등에 고려장 당하는 노인들의 현실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속설은 진실의 일부거나 모자란 진실에 지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자식들의 구심점이자 형제자매 간의 머리다툼을 녹여내는 완충지대다. 당신의 자식사랑은 공평하다. 좀 더 이쁘고 덜 이쁜 놈도 있을 법한데…. 차별과 호불호에 익숙한 자식들의 척도로는 잴 수가 없다. 차별하지 않는 포용이고, 잘난 놈이나 못난 놈이나 모두가 기대는 넓은 언덕이다. 내공 얕은 우린 언감생심 그런 흉내조차 내기 어렵다.

3남5녀의 맨 위 자식이지만 ‘술 좀 적게 먹는 게 내 소원’이라는 어머니의 신신당부를 여전히 지키지 못하는 나는 아직도 한마리 말귀 못 알아먹는 축생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주말 어머니 생신상을 앞당겨 차려드리느라 모인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의 어머니·할머니 사랑을 보며 안도하기도 하지만, 저마다 간단치 않은 개성을 소유한 우리들은 관계와 분별심의 노예로 위험하기 그지없는 무리다. 때로는 갈등하고 또 때로는 충돌하더라도 구심력을 잃지 않아야 하는데…. 새벽부터 내리는 비가 잠시 긋는 사이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흙의 질펀함을 무릅쓰고 고구마 순을 옮겨심고 나자 어렵사리 숙제를 해치운 듯 모처럼 마음이 홀가분해지기도 하지만, 노친네를 뒤로하고 도회로 향하는 발걸음은 매양 무겁기만 하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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