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의 뮤직톡톡] ‘우리의 소원’ 작곡가 안병원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8-05-04   |  발행일 2018-05-04 제39면   |  수정 2018-06-15
20180504

1990년대 이전에 발매된 음반들을 보면 항상 맨 마지막엔 ‘건전가요’라는 트랙이 있다. 가수 혜은이가 부른 ‘시장에 가면’과 합창으로 부른 ‘우리의 소원’ 등이 자주 눈에 띈다. 대부분 무시하며 트랙을 넘기곤 했다. 하지만 록그룹 들국화의 건전가요 트랙에 나오는 ‘우리의 소원’은 건전가요를 그들의 색깔로 잘 표현해냈다고 생각해 지금도 전축 바늘이 위로 솟을 때까지 듣게 된다.

최근 남북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건전가요가 아닌 국민가요로 자주 듣게 되는 노래들이 있다. ‘아리랑’과 ‘고향의 봄’, 그리고 ‘우리의 소원’이다.

이번 칼럼에서는 우리의 소원이란 곡의 기원과 곡에 얽인 사연들에 대해 몇 자 적어본다. 우리의 소원은 1947년 당시 8·15 경축 기념 드라마의 작가 안석주가 주제가로 만든 노랫말에 서울대 음대 1학년에 재학 중인 그의 아들 안병원의 작곡을 더해 만들어진 노래다. 이 노래의 가장 핵심인 ‘통일’이라는 가사는 처음 작사될 당시는 ‘독립’이었다. 당시는 미 군정의 신탁통치 상태였고 남북이 서로 다른 국가에 의지해 단독 정부가 꾸려질 것 같은 흐름이 팽배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광복을 맞이했지만 진정한 독립은 아니라는 생각에 완전한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마음에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라면서 작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20180504

1948년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되고 1950년 이 노래가 교과서에 실리게 되면서 문교부에서 ‘통일’로 하면 좋겠다고 하여 바꾸게 되었다. 그 후 1절밖에 없던 가사에 2·3절을 붙이게 되었는데 2절의 통일의 자리에는 ‘민주’, 3절에는 ‘자유’를 각각 넣어 불리어지게 되었다. 참고로 북한은 ‘자주’와 ‘민주’를 넣어 부른다고 한다.

1990년 10월14일 평양 옥류관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예술단을 위한 환영 만찬의 자리에서 남측 음악인 황병기와 북측의 예술인들, 그리고 해외동포를 대표하는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은 서로 손을 잡고 목이 터져라 합창을 했다고 한다. 환영 만찬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오정숙 명창이 남도민요 ‘성주풀이’와 ‘진도아리랑’을 부르면서 남북 모두가 춤을 추기 시작했고 윤이상 작곡가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고 한다. 며칠 뒤 10월18일 평양에서 제1회 범민족통일음악회가 열렸는데 남쪽의 판소리 명창 조상현이 북쪽의 서도소리 명창 김진명을 업고 무대를 돌자, 무대와 객석에서 무려 7차례나 우리의 소원을 합창하며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얼마 전 작고한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저서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에서 그 당시를 회고한 내용을 살펴보면 그때 일이 몇 줄 적혀 있다. 북쪽에 도착한 남한의 예술단에게 ‘조선은 하나다’라는 문구가 적힌 띠를 두르게 했다. 이에 황병기는 단호하게 문구를 바꾸어 달라고 요청했다.

이때 캐나다로 이주한 작곡가 안병원은 서울시립소년소녀합창단을 지휘하게 되어 한국에 잠시 귀국하게 되었는데 우연히 TV중계를 통해 아버지가 작사하고 자신이 작곡한 우리의 소원을 합창하는 광경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당시 안병원 작곡가의 신문사 인터뷰를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지난 45년간 우리의 소원은 남북통일을 대변하는 노래가 된 것 같아 작곡가로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그러나 제 노래가 부디 ‘흘러간 노래’가 되길 바랍니다. 통일이 되면 제 노래가 더 이상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 사족을 달 글이 필요 없을 것 같아 여기서 줄인다.
재즈드러머 sorikongan@hanmail.net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