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애의 문화 담론] 간송과 호암의 서로 다른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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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04   |  발행일 2018-05-04 제39면   |  수정 2018-06-15
富 버리고 문화유산 남긴 ‘간송’…富 챙기고 문화재단 만든 ‘호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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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의 간송 전형필. <사진출처=간송문화재단·호암문화재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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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이 수집한 훈민정음 해례본. <사진출처=간송문화재단·호암문화재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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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운학상감무늬매병.<사진출처=간송문화재단·호암문화재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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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 미술관에서의 호암 이병철. <사진출처=간송문화재단·호암문화재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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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미술관.<사진출처=간송문화재단·호암문화재단 홈페이지>

우리나라에서 국보급·보물급을 망라한 역대 문화재 수장가라면 단연코 고(故) 간송(澗松, 전형필, 1906~62)과 호암(湖巖, 이병철, 1910~87)을 꼽는다. 두 분은 생전에 경쟁적으로 문화재 수집에 열을 올려 쌍벽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분이 지향한 길은 너무도 달랐다. 간송은 전 재산을 털어 문화재를 수집하고 공유화(公有化)했으나 호암은 달랐다.

간송은 독립운동을 주도한 위창(葦滄) 오세창이 서화에 일가를 이루자 그의 문하에 들어가 민족의식이 투철한 문사(文士)들과 교유하게 된다. 그 당시 장안의 최고 갑부이던 그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연수(年收) 2만 석의 농토 800여만 평. 현대의 억만장자인 이른바 ‘만석지기’였다. 그는 “민족정기를 살려야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위창의 영향을 받아 일제 식민통치 아래 실전되거나 일본으로 유출되는 귀중한 문화유산을 되찾아 보존하기 위해 막대한 재산을 투자했다. 1938년 서울 성북동에 ‘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집’이라는 뜻의 사립미술관 ‘보화각(寶華閣, 현 간송미술관)’을 최초로 설립했다. 이어 인사동에도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열어 고미술품과 고서적 등 각종 문화유산을 수집하면서 단계별로 보존과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澗松傳記)

간송(澗松, 전형필 1906~62)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만석지기
일제유출 문화유산 보존 막대한 투자
1938년 간송미술관 전신 보화각 설립
훈민정음 해례본 등 유산 지키기 심혈
간송 제2미술관 대구 건립에 기대감

호암(湖巖, 이병철 1910~87)
대구 삼성상회 창업후 막대한 富 축적
재력 바탕 취미삼아 문화재수집 심취
공예가구·금관·불상·고려청자 관심
후손들 문화재 상속소송 물의 빚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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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의 ‘미인도’.<사진출처=간송문화재단·호암문화재단 홈페이지>

그 무렵 호암은 간송의 재산에 비해 10분의 1 정도인 연수 2천석지기 선대로부터 300석을 물려받아 마산에서 사업(합동정미소)을 일으켰으나 1년 만에 실패하고 대구로 올라와 삼성상회를 창업(1938년)한다. 그 당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살아가던 일제 강점기의 피폐한 민생고에 착안, 국수공장을 차려 대박을 치고 중국에 수출의 길을 트는 등 오로지 사업에만 집중했다.(湖巖自傳)

간송은 일취월장으로 부를 축적해가는 호암과는 달리 있는 재산을 털어 고서적과 서화, 화첩 등 역대 서성(書聖)과 화성(畵聖)들의 중요한 문화유산을 구하고 지키는 데만 심혈을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안동에서 찾아낸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 국보 70호)이 백미로 알려져 있다. 이른바 ‘안동본’으로 불리는 이 해례본은 간송이 완벽하게 소장해 왔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가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높이 평가된다. 간송은 이 귀중한 문화재를 수집할 때 소장자가 부른 값의 열 배인 1만원에 사들이면서 별도의 사례금 1천원을 더 얹어주었다고 한다. 그 당시 화폐가치로 서울 북촌의 기와집 한 채가 천원 정도 호가했다니 고래등 같은 집 10여 채 값의 거액이었던 셈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1446년(세종 28) 간행된 이래 자취가 드러나지 않았으나 원본을 펴낸 지 494년 만에 이러한 경로를 통해 찾아냈다는 것은 우리 말과 우리글의 교육을 금지한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엄청난 문화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무렵 일본은 ‘나이센잇타이(內鮮一體,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 하여 우리 민족문화를 말살하는 정책에 광분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간송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역사를 알게 되었고 민족의식을 정신적인 토양으로 삼아 기록의 중요성과 진리를 터득했다. 그 결과 폭넓은 식견으로 수집 및 보존의 정통성을 창출해 냈고 후세에 한국미술사를 연구하고 전승하는 ‘간송학파’가 탄생했던 것이다.

1940년엔 동성학원을 설립하고 재정난에 허덕이던 보성고보를 인수, 2세 교육을 위한 육영사업에도 발벗고 나섰다. 광복 이후 6·25전쟁의 잿더미 속에서도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내기 위해 전 재산을 아낌없이 쏟아붓고 말년에 서울 도봉산 자락의 고택 한 채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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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기 호암은 재벌의 반열에 올라서자 풍부한 재력으로 취미 삼아 문화재 수집에 심취한다. 하지만 간송과는 달리 공예가구, 나전칠기, 조각, 석물 등 집안을 장식하는 진열품으로 대형 문화재 수집에 치중하다가 점차 가야, 신라 금관, 금동불상 등 금속공예와 고려청자, 조선백자로 눈길을 돌렸다. 그렇게 수집한 문화재는 망중한을 즐기는 대상으로 혼자서 바라보고 만져보고 비교해 보며 보다 아름다운 것, 훌륭한 것을 추구했다. 말년에 그는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에 석조한옥으로 호암미술관을 건립하고 삼성미술문화재단을 설립했으나 타계 후 유자녀들은 사유재산에 포함된 문화재를 비롯, 거액의 유산 상속소송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간송은 부를 버리고 문화유산을 얻어 문화보국(報國)으로 꿋꿋이 나라의 정신적 근간을 지켰다. 그가 ‘문화독립운동가’로 불리는 이유다. 후손들 역시 간송이 남긴 문화보국의 길을 이어갔다. 미술을 전공한 장남 전성우(1934~2018)는 서울대 미대 교수 겸 전업작가로 활동했으나 선대가 타계하자 유훈을 받들어 간송미술관장을 맡았다. 이어 보성고 교장과 이사장을 거쳐 2013년에는 사회에 환원할 목적으로 간송미술문화재단을 설립했다.

“나는 평생 창고지기였다. 그저 아버지가 모은 귀중한 문화재를 지키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가 간송미술문화재단을 설립할 당시 남긴 유명한 일화다. 참석자들은 여기에 화답하듯 “아버지는 구하고 아들은 지켰다”고 입을 모았다. 동생 전영우는 현재 간송미술관 관장. 대물린 장남 전인건은 간송미술문화재단 사무국장으로 선대의 그늘을 지키고 있다.

그런 간송미술문화재단 제2미술관이 국책사업으로 대구에 들어선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대구가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이자 문화중심도시이기 때문이다. 최근 정부의 재정투자심사를 통과했다는 소식도 전해지고 있다. ‘대구간송미술관’ 건립에 대한 기대감에 가슴이 설렌다. 대구미술협회 사무처장·미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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