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과 책상사이] 오월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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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4-30 08:03  |  수정 2018-04-30 08:03  |  발행일 2018-04-30 제18면
[밥상과 책상사이] 오월이 오면

하늘이 맑고 푸르다. 3월의 꽃샘추위, 4월의 변덕스럽던 날들이 지나가고, 벚꽃·살구꽃·복사꽃 같은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봄꽃의 장막도 걷혔다. 초록의 향연이 시작됐다. 바야흐로 잎의 계절이다. 연둣빛 잎새는 꽃보다 아름답다. 어린 잎은 소녀의 솜털 같은 귀밑머리처럼 부드럽지만, 야심에 찬 소년의 눈처럼 반짝이며 힘이 있다.

“선생님, 아이가 시험 기간인데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요. 타이르고 설득해도 말이 먹혀 들지 않습니다.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지금은 더욱 그런 시대라며 딴짓을 합니다. 이 좋은 봄날 하기 싫은 공부한다고 책상에 붙어 앉아 있는 것보다는 들로 산으로 나가 꽃과 나무를 보는 것이 자기 인생에 더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분명히 누군가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었거나, 어느 책에서 대책 없이 부추기는 엉뚱한 말에 현혹된 것 같은데 방법이 없습니다. 아이가 알아듣게 할 수 있는 묘책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어느 고1 엄마가 도움을 요청하며 한 말이다.

눈과 얼음 사이를 뚫고 꽃이 핀다고 얼음새꽃이라고도 부르는 복수초, 가장 이른 봄에 피는 노루귀 같은 야생화를 바라볼 때 우리 모두는 생명의 경이를 느낀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이 꽃들을 바라본다. 어떤 사람은 당장 눈에 보이는 귀엽고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휴대폰으로 사진 찍기에 바쁘다. 더 잘 찍으려고 꽃잎을 살짝 덮고 있는 낙엽을 밀어내기도 한다.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원상복구도 안 해 놓고 가던 길을 바삐 간다. 어떤 사람은 꽃을 보고 감탄하면서 동시에 어두운 땅 속에서 뿌리가 겪은 혹한의 고통을 생각한다. 새삼 생명 있는 것들의 존엄함을 깨달으며 꽃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우주의 섭리를 생각하며 자신의 옷깃을 다시 여민다. 행여 손이 닿을까 조심하며 주변 낙엽들을 긁어 모아 근처를 감싸주고는 조용히 자리를 떠난다.

겨울을 슬기롭게 인내한 뿌리만이 봄꽃을 피울 수 있고, 폭설과 모질고 독한 북풍에도 가지가 부러지지 않은 나무들만 저 푸르고 싱싱한 잎들을 키울 수 있다. 이 봄이 지나면 숨이 턱턱 막히는 한여름. 잎이 타들어가는 가뭄과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는 홍수와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자신을 지켜낸 나무들만이 가을날 탐스러운 과일을 생산할 수 있다. 부모 자녀가 함께 칼날 바람 드센 겨울 들판에 나가보고, 비지땀을 흘리며 여름 산에 올라보자. 겉으로 드러나는 꽃과 잎만 보지 말고 어두운 땅 속에서 잠시도 쉬지 않고 자양분을 빨아들이는 뿌리의 눈물겨운 분투를 함께 이야기하자. 어떤 분야에서든 일가를 이룬 사람들은 거의 예외없이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피나는 노력을 하고, 겸손한 자세로 평생 열심히 배운다는 이야기도 해보자.

짧아서 더욱 황홀한 봄날이 절정을 향해 가고 있다. 평일에는 열심히 공부하고, 주말에는 온 가족이 들로 산으로 나가보자. 신록의 합창에 동참하며 내 몸이 파랗게 물들 때까지 연두와 초록의 향연에 흠뻑 취해보자.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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