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갑질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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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4-24   |  발행일 2018-04-24 제31면   |  수정 2018-04-24

‘갑질’이란 말이 세간에서 회자된 지 오래다. 이미 2년 전에 국립국어원의 온라인 국어사전 ‘우리말샘’에 신조어로 등록돼 있기도 하다. ‘상대에 비해 유리한 위치에 있는 자가 상대를 호령하거나 자신의 방침에 따르게 하는 짓’이라고 풀이돼 있다. 사전인 만큼 비교적 점잖은 표현인데, 여기에다 특권의식·안하무인 같은 단어를 넣으면 좀 더 가슴에 와닿을 듯하다.

당연하겠지만 외국에선 갑질이 낯선 개념일 수밖에 없다. 딱히 마땅한 영어식 표현도 없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갑질이란 말이 급속도로 세계화되고 있는데, 그 주역은 대한항공의 두 자매다. 스타트는 언니가 끊었다. 조현아 칼호텔네트워크 사장은 대한항공 부사장이던 2014년 말 ‘땅콩회항’으로 세계적인 이목을 끌었는데, 해외언론은 그때 처음으로 ‘gabjil’이라는 원어를 그대로 썼다. 그러면서 ‘high-handedness(고압적인 행태)’라고 부연했다. 한국의 갑질 알리기 바통은 동생이 넘겨받았다. 최근 미국 뉴욕타임스는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의 ‘물컵 투척’ 사건을 ‘gabjil’이라고 보도했다. 그리고 ‘중세시대 영주처럼 부하직원이나 하도급업자에게 권력을 남용하는 행위’라고 자세히 설명했다. 이런 일들을 보면 ‘갑질’이 ‘김치’ ‘막걸리’처럼 영어사전에 등록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대한항공 자매의 갑질 사건이 잇따라 불거진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갑질과 불법, 비리를 고발하는 내부 제보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가히 ‘을의 반격’이라고 할 만하다. 이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대국민사과를 하고 두 자매를 경영일선에서 사퇴시키겠다고 했지만,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조 회장 일가가 유별난 구석은 있지만 사실 재벌가의 갑질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그리고 재벌가가 아니더라도 갑질은 사회 곳곳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진다. 생각해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오로지 ‘을’인 사람도 거의 없다. 직장의 말단 직원이나 아파트 경비원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갑이 될 수도 있다. 권위주의와 상명하복 문화가 강한 곳이라면 갑질은 늘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갑질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모두 되볼아볼 일이다.

허석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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